1819년 10월11일 순조의 아들 효명(孝明)세자는 부사직(副司直)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그의 나이 열한 살 때다. 여느 국혼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이 혼례는 조선 후기 정치 판도를 뒤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800년 순조 즉위 후 정치권을 좌지우지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유력한 라이벌이 등장한 것이다. 조만영은 딸이 세자빈에 간택된 뒤 대사성·금위대장·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순조의 건강 악화로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1827년에는 이조판서와 어영대장을 겸임하면서 인사권과 군권을 동시에 장악하기도 했다. 특히 조만영은 효명세자나 왕세손(훗날 헌종)의 신변 보호와 왕실 안전을 명분으로 군권을 틀어쥐면서 풍양 조씨 일가가 세도(勢道)정치의 한 축으로 부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세자빈 조씨는 효명세자가 스물두 살의 나이에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아들인 헌종이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살아 있어 철종까지 2대째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것은 순원왕후였다. 그렇게 숨죽이며 지내던 조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효명세자 사후에 신정왕후(神貞王后)라는 시호를 받은 조씨는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철종마저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권한을 한 손에 쥐게 됐다. 그전부터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손을 잡고 있던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고종)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이후 신정왕후는 1866년까지 3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경복궁 중건과 세제 개혁 등 남편 효명세자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신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받았던 죽책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세자빈 책봉에 관한 글을 대나무 쪽에 새겨 수여하는 문서인 죽책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프랑스의 개인 소장자로부터 2억5,000만원을 주고 죽책을 사들여 지난달 20일 국내로 들여왔다. 조선왕실 공예품의 전형인 소중한 문화재가 150여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겼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오철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