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로터리]주성씨의 작은 행복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



한국에서 가장 오래 방송된 드라마는 무엇일까. 기록을 살펴보니 지난 1980년 10월21일부터 2002년 12월29일까지 무려 1,088회나 방송된 ‘전원일기’다. 드라마 속 ‘양촌리’라는 마을 이름은 지도에는 없지만 중장년 시청자들의 추억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한때는 양촌리가 어렴풋이 양수리 근처가 아닐까 추측해본 적이 있다. ‘양평(楊平) 군내의 물 좋은 마을’ 정도로 편하게 상상한 거다. 최근에야 양수리가 남한강과 북한강, 양쪽의 물(水)이 만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무지의 기간이 꽤 길었다.

양촌리와 양수리가 글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순전히 박주성씨 덕분이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직원이다. 재작년 9월 나는 그를 ‘수행비서’로 처음 소개받았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는 누가 누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즐겁게 ‘동행’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출근하러 집을 나서는 순간 나의 발걸음은 곧바로 둘만의 음악실로 이어진다. 내가 추천한 다이얼에 주파수를 맞춘 후부터 우리의 음악적 취향은 놀랍도록 닮아갔다. 예능 프로듀서(PD) 출신인 나는 음악마다 해설을 해주고 그는 차분하게 공감해준다(그 시간만큼은 내가 ‘임진모’다). 노래가 있고 미소가 있고 무엇보다 진심이 있는 작은 공간은 나의 하루를 환하게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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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주성씨가 주로 말을 하고 내가 맞장구를 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양평 이야기다. 그는 주말 농부다. 큰처남과 함께 깻잎·상추·생강·배추·감자, 거기다가 사과·배·포도·자두까지 재배한다. 지난해 탄저병으로 고추농사가 망했다고 말할 때는 영락없는 양촌리(실제로는 양평 국수리) 농부다. 직접 키운 감자 몇 개를 선물로 받았는데 감자 찌는 냄새가 그렇게 달콤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찾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늘고 있다. 음악을 공유하고 추억을 되살리고 감자를 나눠 먹는 순간이 내게는 그렇다.

주성씨와 친구가 되면서 만남의 의미가 각별해졌다. 다르게 흘러온 두 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우리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사람을 만나고 예술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확실한 행복인가. 그러니 만나기만 하면 눈부터 부라리는 사람들, 애초에 만남 자체를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소중한 인생의 절반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봄에는 나도 양평에 소풍을 가야겠다. 하루쯤 양촌리 사람으로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매일매일 다투며 부글부글 끓는 심정으로 ‘난중일기’를 쓴다는 지인에게는 가끔 보글보글 끓는 된장국 냄새가 나는 ‘전원일기’도 써보라고 권할 참이다.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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