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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인터뷰] ‘흥부’ 정진영의 연기철학 “관성적으로 살면 안 돼”

배우 정진영의 온화한 민낯이 놀부의 탈을 썼다. 이번에는 조항리라는 인물로 조선을 가지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영화 ‘흥부’(감독 조근현)는 조항리의 악행을 통해 지금 시대가 잊고 있던 ‘권선징악’과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정진영은 인간 욕망의 밑바닥을 보여주며 가장 근원적인 교훈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배우 정진영 /사진=지수진 기자배우 정진영 /사진=지수진 기자





‘흥부’는 붓 하나로 조선 팔도를 들썩이게 만든 천재작가 흥부(정우)가 남보다 못한 두 형제 조항리(정진영)와 조혁(김주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세상을 뒤흔들 소설 ‘흥부전’을 집필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진영은 ‘흥부’ 속 조항리와 전혀 달리, 따스하고 너그러운 미소로 취재진을 맞으며 ‘흥부’의 매력을 소개했다. “나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맨 처음에 보고 감독에게 ‘활기찼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힘을 가지고 부딪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김)주혁이 사건(사망) 이후 영화 톤을 너무 가볍지 않게 손 볼 수밖에 없었지만, 설에 늘 마당놀이가 차지해온 바가 있듯이 그걸 연희 장면으로 보여주려 했다. 애초에 ‘흥부’는 설 목표로 기획되고 촬영된 영화다. 전혀 어렵지 않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주가 함께 보면서 만족할 것이다.”

최고의 권력 가문인 광양 조씨의 병조판서 조항리는 도성 최고의 글쟁이 흥부의 소식을 듣고 그의 글을 이용해 조선을 호령할 거대한 야욕과 냉혈함을 드러내는 인물. 정진영은 극 중 놀부 캐릭터의 모태가 되는 조항리를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선보였다.

“어떤 계획을 잡고 연기할까 고민했다. 기본적으로 형제 이야기의 모티브를 살리면서 놀부 캐릭터도 살리는 복합적인 인물을 고민했다. 고위관리직으로서의 교활함도 있지만 욕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천박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단면적인 악역은 재미없겠다고 감독에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감독님도 재미있겠다며 의견을 수용해줬다. 조항리는 그야말로 연극을 하는 인물이다. 상황에 따라 종종 뛰어다니기도 하고 경쾌하고 재미있게 촬영했다.”

‘흥부’를 보다 보면 지난해 국정농단부터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위험한 권력가가 초래한 일련의 ‘비극적 사건’이 떠오른다. 이 같은 반응에 정진영은 “그런데 이 영화는 정치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흥부전’에서 모티브로 한 또 다른 영화일 뿐이다. 그 재미가 있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라 생각 한다”며 “‘흥부’는 인류가 몇 천 년 동안 해온 이야기를 전한다. 핍박받는 백성과 그걸 이기고자 하는 민중의 염원은 보편적인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배우 정진영 /사진=지수진 기자배우 정진영 /사진=지수진 기자


“아마 지난 1~2년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흥부’의 내용이 더 다가오겠다. 그 당시의 궁궐은 광화문인데 그 곳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구체성으로 다가온 것이겠다. 나 또한 해학적이고 천박한 고위관리직을 연기할 때 몇몇 인물들이 보였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대본 지문에 ‘ㅊ+ㅇ+ ㅂ=조항리’라고 적어놓고 연기했는데, 그 사람들의 액션까지 모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이 연희에 있는 장면은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를 연상케도 한다. 정진영은 ‘왕의 남자’에서 연산으로 분한 바 있다. “격정적인 부분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왕의 남자’ 연산은 내면의 상처가 깊어서 연민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흥부’의 조항리는 동정의 여지도 없는 악인이었다. 디테일도 달랐다. 조항리는 상황 속에서 미워보여야 하는 인물이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 놀부’의 관계에서 시작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유리함이 있었다. 둘이 만나는 장면이 많지 않아도 형제 관계가 명확히 설명된다.”


‘흥부’의 메가폰을 잡은 조근현 감독은 앞서 ‘장화, 홍련’에서 강렬하고 매혹적인 미술 감각을 선보이며 충무로에서 주목받은 후 ‘형사 Duelist’ ‘음란서생’ ‘후궁’ 등 사극영화에서 세련된 동양미를 담아왔다. 미술감독으로 유명했던 조근현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어땠을까. “굉장히 재미있게 작업했다. 미술감독 스타일이셔서 공간 감각이 뛰어났다. 앉아서 하는 대사가 많았는데도 지붕 위에서 대사를 한다든가 공간을 최대한 넓혀서 촬영했다. 배우 입장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좋았다. 합도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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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중심인 조선 최고의 천재작가 흥부로 분한 정우에 대해서는 “정우와 붙는 장면이 많지 않았는데도 열정적인 게 느껴졌다. 한창 열심히 달려가는 시기인데 앞으로도 더 좋은 작품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다”고 칭찬했다.

다가오는 설 연휴에 극장가 대결작으로 ‘염력’ ‘조선명탐정3’ ‘흥부’ ‘골든슬럼버’가 개봉한다. ‘흥부’의 흥행을 어떻게 예상하는지 묻자 그는 “설 시즌이어서 관객들이 몰릴 텐데 각각의 영화가 다 지지를 받을 것 같다. 흥행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흥행만 보고 일하면 안 된다. 그럼 배신당한다. 제일 좋은 건 내가 현장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다. 현장에서 재미있고 싶다”고 전했다.

배우 정진영 /사진=지수진 기자배우 정진영 /사진=지수진 기자


정진영은 필모그래피에 ‘클레어의 카메라’와 ‘풀잎들’을 추가하며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출연했다. 이에 “작은 영화를 2년 전부터 계속했다. 장률 감독의 ‘거위를 노래하다’라는 작품도 했는데 그런 류의 작품을 하고 싶었다. 재미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시간만 맞으면 갑자기 만나서 작업하면 되는 스타일이다. 마침 다른 작품 촬영이 끝나고 내 스케줄이 딱 맞아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초록물고기’ ‘약속’ ‘비천무’ ‘킬러들의 수다’ 조연부터 ‘달마야 놀자’ ‘황산벌’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평양성’ ‘국제시장’ ‘판도라’ ‘대장 김창수’ 등 굵직한 작품을 해온 그는 최근에 작은 영화 출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실 내 연기의 시작점은 대중적이기 보다 메시지를 위한 작품들을 했다. ‘약속’이란 영화를 하면서 대중적인 작업을 하게 됐다. 그 안에서 배우로 20년을 살아왔다. 이제 또 다시 내가 원래 갔던 취향을 찾아가겠다.”

“고맙게도 배우 일을 하면서 중년의 끝자락까지 왔다. 이제는 좀 더 선택에서 자유로운 상황이 된 것 같다. 원래 영화감독을 꿈꿨는데 이쪽 일을 생각할 때 무었을 중요시 했나 돌아보게 됐다. 관성적으로 살아가면 안 되겠다 생각한다. 어떤 포지션, 필드에 있든 ‘연기’는 똑같다. 큰 영화나 작은 영화는 ‘영화’로서 똑같다. ‘배우’로서의 책임도 똑같다. 지금은 내 동력을 새롭게 얻고자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연기는 여전히 어렵지만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폭넓은 견해와 철학을 보이는 정진영은 어디서 영감과 자극을 얻을까. “자극은 누가 주지 않으면 내가 받는 것이다. 언제나 안테나를 열어두려고 노력한다. 자극은 결국 내가 받아야 한다. 예술적 자극도 많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생각한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큰 자극이라 생각한다.”

매 작품마다 응집력 있고 힘 있는 연기를 펼치는 정진영은 여전히 연기는 늘 어려운 것이라 강조했다. “쉬워질 리가 없다. 쉬워지면 관둬야 한다. 눈 감고도 할 수 있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러면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 작품을 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한다. 겸손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뛰어난 배우는 아니라 생각한다. 다만 열심히 하려 한다. 나이가 들면서 분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름살이 늘어날 때마다 오히려 그 수만큼 새로운 작품을 할 수 있는 계급장을 얻는다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진영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으며 최근 들어 새로운 꿈 하나를 가지게 됐다고 밝혔다. “아직 그것이 무어라 말할 수는 없는데, 요즘 어떤 꿈을 가지고 있다. 그게 나를 굉장히 생동감 있게 만든다. 우리 영화에서도 꿈을 메시지로 하는데 우리 모두에게 꿈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요즘은 ‘희망’을 바라보지 않게 되고 살기가 참 힘들다. 내가 오늘 하고 싶은 게 뭘까 선택할 수 있는 게 ‘꿈’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해야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게 현실이다. ‘꿈을 꾸는 것도 죄다‘라는 조항리의 말이 그래서 나쁜 말인 것이다.”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

한해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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