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시행 일주일 만에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11일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은 국가생명윤리정책원이 마련한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의 온라인 등록을 잠정 중단하고 당분간 우편으로 이행서 사본을 제출하기로 했다.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은 의료진들이 환자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 연명의료 이행 여부 등을 전산입력하는 시스템으로 법 시행일인 4일 오픈했다.
하지만 전산입력 절차와 요령이 까다롭다는 의료진의 불만이 쏟아졌다. 환자의 ‘서명’이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에 입력되지 않아 서류를 스캐닝한 PDF 파일을 따로 보내야 하고, 입력 뒤 하나라도 수정하려면 공문을 보내야 하는 등 불편하고 번거로운 절차 때문이다. 환자의 서명을 태블릿PC로 받아 입력하려고 해도 특정 회사의 기기에서만 시스템이 구동되는 것도 문제였다.
병원 전산시스템과 연동되지 않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환자인지 여부를 별도로 확인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의료인들은 분초를 다투는 긴급상황이나 ‘3분 진료’ 시간에 환자가 관련 서류를 제출했는지를 전산으로 확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연명의료결정법 준비위원장(공공보건의료사업단장)은 “전산입력을 보이콧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해보려다 포기한 상황”이라며 “한 사람 서류 작업에만 30분~1시간이 걸리고 그마저도 수정하려면 공문을 보내야 해 환자를 위한 시스템인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연명의료결정법 규정은 까다로운데 이를 뒷받침해줄 인프라는 미흡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을 때 가족이 환자 대신 연명의료 중단 결정서에 서명하려면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병원에 이 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는 단말기가 없어 동사무소에 서류를 떼러 간 사이 환자가 사망해 병원이 항의를 받은 일도 벌어졌다. 직계가족 모두의 동의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족과 의료인이 요청한 연명의료 중단 결정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는 병원 윤리위원회가 설치된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이 지난 3일 현재 1.8%(3,324곳 중 59곳)에 불과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윤리위가 없는 병원에서 임종기를 맞은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을 원할 경우 윤리위가 구성된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규모가 큰 상급종합병원은 42곳 중 23곳(55%), 종합병원은 301곳 중 30곳(10%)만 윤리위가 설치돼 있다. 병원급은 요양병원 1,519곳 중 4곳, 일반 병원 1,462곳 중 2곳 등 0.2%만 윤리위가 구성돼 있다. 윤리위는 종교계·법조계·윤리학계·시민단체 등의 추천을 받은 비인료인 2명 이상을 포함해 총 5명 이상으로 구성된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따라 의료계·종교계를 포함해 사회 각계에서 제기하고 있는 우려 사항을 반영해 법 개정에 나설 계획이다.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도 말기·임종기 환자뿐 아니라 수개월 안에 임종과정에 들어갈 것으로 예측되는 환자는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말기환자 진단 후 호스피스전문기관에서 지내는 환자에 대해서는 의사 1명이 임종과정에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현행법상 연명의료란 치료 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 연장하는 네 가지 의학적 시술(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을 말한다. 임종과정이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상태다.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란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으로부터 임종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