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한국화, 디지털 픽셀회화로 표현...'혁신'을 붓터치로 했죠"

■'현대적인 한국화' 새 지평 연 도건 석철주 화백

'몽유도원도' '박연폭포' 등

과거 명작의 정신적 유산들

서양화 재료 등으로 재해석

늘 새로워야함이 작가 숙명

기업인·경제인과 차이 없어

최신작 ‘신 몽유도원도’를 배경으로 석철주 화백이 자신이 그린 강아지 그림들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양주=권욱기자최신작 ‘신 몽유도원도’를 배경으로 석철주 화백이 자신이 그린 강아지 그림들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양주=권욱기자




석철주(68·추계예대 명예교수) 화백이 서울경제신문 독자들을 향한 새해 덕담을 담아 보내온 그림 속 강아지는 짙은 색의 두터운 입매가 과묵해 보이면서도 익살맞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에는 늘 전진하는 동시에 둥근 자전거 바퀴처럼 두루 원만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동시에 자전거로 달리며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듯 늘 깨어 있고 자전거 타는 사람의 마음으로 앞뒤 좌우 균형감을 유지하자는 제언도 함축한 그림이다. 귀여운 불도그 느낌의 퍼그는 다정한 성격이며 특히 인내심이 강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성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을 앞둔 14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작업실에서 만난 석 화백은 “예부터 개는 잡신과 액을 막아주는 신물이었고 풍수지리적으로는 견상(犬像)으로 주변의 나쁜 기운을 제거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오늘날의 개는 집을 지키는 책임감을 가진 존재이면서 사랑으로 돌봐줘야 하는 반려견으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지금은 연하장이나 문자메시지가 설 인사를 대신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새해를 맞아 그림을 그려 주고받는 세화(歲畵)의 풍습이 조선 초부터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중종실록에는 “세화는 설 즈음 미리 화사(畵師)에게 화초·인물·누각을 그리게 하고 그림을 볼 줄 아는 재상에게 그 우열을 등급 매기고 골라 신하들에게 하사한다”고 적혀 있고 ‘동국세시기’에는 세화에 대해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노인성(壽星)과 하루하루의 액운을 물리치는 수호신(直日神將)을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며 서로 축하하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석 화백은 “왕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세화’뿐 아니라 민가에는 세함(歲銜)이라 불리는 쟁반을 대문 안에 두고 세배 온 사람들이 명함을 두고 가는 풍속이 있었다”면서 “새해가 되면 그해의 십이간지를 그림으로 그려 연하장을 만들면서 새해를 준비하는데 문자나 메신저로 쉽게 인사를 주고받는 요즘 세대의 눈에는 번거로울지 모르지만 이렇게 그림을 구상하고 준비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깨달음과 다짐의 시간이 생기니 행복한 수고로움”이라고 밝혔다. 산수와 영모화(翎毛畵·동물그림)에 두루 능통한 석 화백이지만 세화를 그릴 때는 화가이자 동화작가인 부인 이정희씨와 상의해 캐릭터를 제작한다.

석철주 화백/양주=권욱기자석철주 화백/양주=권욱기자


서울 종로구의 경복궁 서쪽인 서촌에서 나고 자란 석철주 화백은 근대 동양화 6대가 중 으뜸으로 꼽히는 청전 이상범(1897~1972)과 한동네에 살았다. 이상범은 안채를 손봐준 동네 목장(木匠)으로부터 막내아들이 곧잘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를 들은 후 기별 없이 그 집을 찾아갔다. 열여섯 살 사내아이가 “눈이 맑고 영특해 보여” 난초 그림을 한 장 주며 따라 그려보라고 했다. 두 달 뒤 어찌나 연습을 했던지 검고 너덜너덜해진 그림을 갖고 찾아온 아이는 이상범의 마지막 무릎제자가 됐다. 이후 석 화백은 추계예대·동국대에서 체계적인 동서양 미술을 익혔고 모교에서 후학을 키워내며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끝없이 연구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를 비롯해 ‘매화서옥도’ 등을 재해석한 석철주의 작품은 ‘법고창신’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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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고 빠른 속도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됐지만 발전 과정에서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않나 반성해야 합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현재를 기반으로 미래가 펼쳐집니다. 동시에 지나간 과거는 지나갔으니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고 현재 또한 자꾸만 지나는 찰나일 뿐이니 시간은 ‘공(空)’이기도 합니다. 멈추지 않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인공지능(AI)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시대정신을 열어가는 일이 지금 우리의 과제지요.”

석 화백은 유물로 남을 뻔한 과거 명작을 현대로 불러내 그 정신적 유산을 현시대에 맞게 풀었다. 동양적 필치를 사용하되 서양화 재료를 절묘하게 이용했다. 그의 산수풍경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는 아크릴물감의 보조제를 이용한 물과 기름의 반발력에서 형성됐고 붓뿐 아니라 손가락, 대나무 뭉치, 밀개(squeeze), 인두 등이 자유자재로 쓰인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해 5년 주기로 작품의 변화를 시도하는 그는 최근 그물을 그림에 덮어씌운 듯한 ‘신 몽유도원도’를 선보이고 있다. 20세기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신문제작과 만화 기법을 차용한 망점(Benday-Dot)를 사용했다면 석철주는 21세기의 디지털 픽셀회화를 시도한 격이다.

“어느 여름 강원도 계곡의 텐트 안에서 아침을 맞았어요. 모기장 안에서 본 새벽녘 풍경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고 그 순간의 청량감을 담아 새로운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물망이 꼭 모니터 화면을 확대한 픽셀 화면처럼 보이죠.”

석 화백은 “비빔밥은 누구나 다 아는 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맛은 제각각”이라며 “일관된 뿌리를 갖고 있지만 소재와 내용을 바꿔가며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변신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이지만 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기업인·경제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흥=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 권욱기자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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