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2013년 하나은행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해 자진 사임한 12일 오전만 해도 금융감독원 내부에서는 ‘사실관계를 명백히 따져보자’는 기류가 강했다. 실제로 최 원장은 이날 오전 임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하나은행 관련 특별검사단을 꾸려 객관적이고 공정한 조사를 진행하겠다”며 “하나은행 인사에 간여한 사실이 없는 만큼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금융당국의 한 고위관계자는 특검단 출범과 관련해 “일방적인 의혹 제기에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하나은행의 2013년 채용 과정을 전수조사하겠다”고 설명했다. 2013년 하나은행 채용에 문제가 있었다면 최 원장뿐 아니라 당시 임원들까지도 전부 조사해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일종의 배수진이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금감원과 하나금융이 정면충돌을 넘어 극한대립에 이르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날 오후 들면서 금감원 안팎의 분위기가 반전됐다. 최 원장은 이날 오후 2시께 긴급 임원회의를 소집해 자진 사임하겠다는 뜻을 직접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성들의 성폭력 등을 신고하는 ‘미투(Me Too)’ 운동으로 판세가 바뀔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진 상황에서 금융당국 수장이 2030세대층은 물론 부모세대까지 공분하는 ‘채용비리 연루’ 의혹을 받으면서 더 이상 그대로 두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 원장이 억울하더라도 의혹이 불거진 상황에서 직을 유지하게 두면 청와대가 채용비리를 감싸고 돈다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청와대에서 최 원장에게 결단을 내려달라고 주문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표심(票心)에 극도로 민감한 채용 문제가 연루됐다는 점, 일명 미투운동으로 여권 지지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불법적인 행위를 한 사실이 없으나 금융감독원의 수장으로서 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더구나 당시 금융지주 사장이던 최 원장이 추천해 놓고도 청탁이 없었다고 설명하는 건 여론과 동떨어진다는 부정적인 기류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일부에서는 잦은 구설수에 올랐던 최 원장이 감독수장으로 부적절하다는 시장의 평가도 일부 작용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다. 최 원장은 그동안 “비트코인은 거품으로 꺼질 수밖에 없다. 내기해도 좋다(2017년 12월 기자간담회)” “하나금융이 우리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2018년 2월 기자간담회)” 등의 발언으로 국회에서 사과하고 금융권 안팎의 비판을 사왔다. 더구나 금감원장 취임 이후 금융사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못하는 경우도 있어 준비가 덜 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편으로는 민간 출신 1호 금감원장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 금감원 개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최 원장이 외부자의 시각으로 금감원에 들어온 덕분에 지난해 임원 전체를 교체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내부 분위기를 쇄신했고 조직재편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과거 민간 금융사에서 임원들이 응시자를 추천하는 관행이 있던 게 사실”이라며 “최 원장이 낙마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민간 출신 금감원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비관료 출신의 금감원장이라는 점에서 모험적인 시도였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결국 불명예 사퇴로 마감하면서 현 정부의 금융 홀대론이 낳은 인사 참사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최 원장이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기고 동문이라는 점 때문에 ‘라인’을 형성한 것처럼 외부에 비쳐 오히려 윗선에서 부담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후임 금감원장으로는 관료 출신인 김광수 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과 정은보 전 금융위 부위원장 등이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최 원장이 자진해 옷을 벗으면서 시중은행들은 ‘후폭풍’ 가능성에 떨고 있다. 실제로 금감원은 이날 최 원장의 사퇴와 관계없이 하나은행 특검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2013년 하나은행 채용 과정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최 원장 추천을 받은 응시자나 다른 응시자에게서 점수가 조작된 흔적이 발견된다면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질 수 있다. 금감원은 이미 지난 연말 국내 11개 은행에 대해 채용비리 의혹(2015~2017년)을 조사해 하나·국민 등 5개 은행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검찰에 넘긴 상태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최 원장 사임에 따라 채용비리 불길이 더 거세질 수 있다”며 “금융위원회가 나서 문제 금융지주사 경영진에 대해 사퇴 권고를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서일범·김기혁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