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저희도 깜짝 놀랄 만큼 지속적이고 끔찍한 성폭력이 일어났다. 이 환경에 노출돼 소리 없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나갔던 여성 영화인들, 피해자분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현장에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에 참석한 임순례 감독은 이같이 말하며 영화계 만연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임순례 감독은 명필름 심재명 대표와 공동 센터장을 맡았다.
이날 개소식에서는 영화진흥위원회와 여성영화인모임은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여성 영화인 3명 중 2명은 성폭력 혹은 성희롱 피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줬다. 이 조사는 지난해 7∼9월 배우와 작가·스태프 등 영화계 종사자 749명(여성 467명, 남성 267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배우 문소리는 “미투 운동을 지켜보면서 주변의 많은 동료와 선후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며 “많은 영화인들이 함께 아프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해자나 피해자, 방관자였거나 암묵적 동조자였음을 영화인 전체가 인정해야 한다”며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계) 전체의 문제임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순례 감독은 ‘미투(#MeToo·나도당했다)’ 캠페인의 정치 공작설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다. 임 감독은 “지금 ‘미투 운동’이 일부 거대한 다른 것을 덮기 위한 공작설이다는 잡스러운 이론들이 많이 대두되고 있다”며 “저희가 미세먼지가 많다고 해서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만 살 수 없듯, 여성과 관련된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논리로 덮으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희 물길이 바르고 합리적으로 나가는 것, 저희가 원하는 성이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 꿈꾸는 민주 사회로 가는 가장 옳은 방향이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남순아 감독은 영화 ‘걷기왕’에서 스크립터로 참여하며 성폭력 예방 교육을 제안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으니 다른 현장과 다를 거라고 기대했지만 겨우 두 시간 교육으로 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며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영화계 공동체는 거의 없다. 제작사와 투자사가 최소한의 방지책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주요 스태프들의 의지도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앞으로 영화계의 성평등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앞장선다는 계획이다. 센터장인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과 피해자 보호, 나아가 한국영화계의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해 활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든든은 영화인을 대상으로 성폭력·성희롱 예방강사를 양성해 영화현장에서 교육을 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성폭력 예방을 위한 가이드북을 만들기로 했다. 성폭력 피해자 상담과 법적 대응은 물론 심리적·의료적 지원도 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성평등한 영화산업 환경을 위한 정책 마련에도 힘쓸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