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흙과 불, 땀이 빚어낸 빛...소박한 찻잔에 禪을 담다

■ 경운미술관 '다선일미(茶禪一味)'전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명품 다완 29점 선보여

전통 서화로 격조 더해

‘고려녹청자 해무리굽완’을 주칠잔대 위에 놓고 연잎 모양 은제 찻뚜껑인 ‘은하’를 덮어 사용한 것이 고려 귀족의 차 문화였다. 다완은 고려 것이지만 은하는 벽화를 근거로 재현됐다. /사진제공=경운박물관‘고려녹청자 해무리굽완’을 주칠잔대 위에 놓고 연잎 모양 은제 찻뚜껑인 ‘은하’를 덮어 사용한 것이 고려 귀족의 차 문화였다. 다완은 고려 것이지만 은하는 벽화를 근거로 재현됐다. /사진제공=경운박물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기면 커피 소비가 늘고, 3만달러를 넘어서면 차(茶)를 즐기기 시작한다고 했다. ‘3만불 시대’를 앞둔 우리나라도 차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가운데 귀한 고려와 조선의 다완(茶碗·찻사발)을 모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로 경운박물관에서 오는 21일까지 열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전이다. 차와 선(禪)은 같은 맛이라는 뜻이다. 고려부터 조선의 명품 다완 29점을 선보이며 다실에 어울리는 전통 서화작품을 함께 배치해 격조를 더했다. 경기여고 동창회인 경운회가 운영하는 경운박물관의 첫 외부 기획전으로, 고미술감정 전문가인 이동천 박사가 기획했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16세기 조선의 이도(井戶)다완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이 정착해 만든 막사발 모양의 찻사발을 ‘이도다완’이라 부르게 됐지만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동천 박사는 “이도다완의 안쪽이 마치 우물처럼 깊은 느낌을 줬기에 ‘이도(井戶)’라는 이름이 지어진 듯하다”고 조심스레 추정했다.

16세기 이도다완 /사진제공=경운박물관16세기 이도다완 /사진제공=경운박물관


이도다완은 15세기 청자에서 16세기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찻잔이다. 시루에 쪄낸 찻잎을 맷돌로 곱게 갈아낸 말차(抹茶) 문화가 일본 다도의 한 축을 차지하면서 전용 찻사발이 필요하게 됐는데 중국의 화려하고 인위적인 다완은 일본의 미감에 맞지 않았다. 소박하지만 자연미를 머금은 조선 찻사발이 적격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조선 도공들을 대거 납치했고, 일각에서는 임진왜란을 다완 때문에 벌어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전시에 선보인 입지름 14㎝의 이도다완은 노란빛인 듯하지만 푸른색과 붉은색 기운이 감도는 부드러운 느낌의 비파색이다. 이도다완의 특징은 굽 언저리의 유약이 터져 생긴 몽글몽글한 ‘매화피’다. 안쪽에 점처럼 찍힌 ‘메’는 그릇을 포개서 구웠기 때문에 남은 흔적이다. 이동천 박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년 전, 고급 이도다완은 일본에서 쌀 5만석에 거래됐다”면서 “당시 대마도 연간 쌀 수확량이 2만석인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도다완 ‘기자에몬’은 일본의 국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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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청자 음각연판문완’. 일그러진 모양이 멋으로 읽히는 다완이다. /사진제공=경운박물관12~13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청자 음각연판문완’. 일그러진 모양이 멋으로 읽히는 다완이다. /사진제공=경운박물관


흙과 불, 도공의 땀이 빚어낸 다완은 좋은 기운을 내뿜는다. 약간 기울고 일그러진 잔이 오히려 가슴 철렁한 감동을 전한다. 차를 사랑한 일본 고위층 무사들은 불가마 안에서 찌그러질지언정 깨지지 않고 버텨낸 그릇을 ‘기운이 좋은 잔’으로 높이 평가했다. ‘고려도경’의 기록과 그림으로만 전하던 은으로 만든 연잎 모양 뚜껑인 ‘은하(銀荷)’를 전통 공예술로 재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북송 휘종 때 무덤인 ‘백사 제2호 송묘’의 묘실벽화를 근거로 삼았다.

도자기를 굽기 전 일부러 유약을 안 묻혀 차색이 그릇이 배어나게 한 ‘화간’, 차를 담으면 그 색이 더 깊어 보이게 한 회청사기 등 그릇 하나하나가 귀하디귀하다. 말차 녹이는 찻솔이 잘 돌 수 있게 그릇 안쪽이 둥근 ‘기벽의 묘’나 말차에 적합하게 주둥이가 긴 주전자를 사용하다 보니 잔이 흔들리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잔대를 사용한 점 등도 흥미롭다. 카푸치노 같은 말차 거품의 흔적이 다완 안에서 문양처럼 남은 모습도 눈길을 끈다. 이동천 박사는 “일본에서 전하는 다회기(茶會記)에 따르면 요리 먹고 차 마신 후 다도구와 서화를 감상했기에 어울리는 서화를 함께 선보였다”면서 “다완을 볼 때는 입매를 먼저 보고 옆,안쪽을 두루 보고는 뒤집어 굽까지 감상한다”고 말했다.

‘동국이상국집’을 쓴 고려 문인 이규보는 “눈처럼 새하얀 차 반사발로 번민과 근심을 씻고” 나아가 “차 한사발로 참선을 시작했다”고 했다. 조선의 다인(茶人) 신위는 “선(禪)은 차 맛이 돌아온 달콤한 잠”이라고도 했다. 세상사 잠시 잊고 참선하듯 마음을 다스리기에 더없이 좋은 전시다.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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