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7년 발간돼 한국 소설 최초로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는 어느 날 악몽을 꾼 후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딸의 채식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는 가족모임에서 주인공의 입에 억지로 탕수육을 밀어 넣고, 가족들은 방관한다. 주인공은 결국 이 사건 이후 칼로 손목을 긋는다.
극단적인 스토리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시선은 이와 다르지 않다. 채식주의자에게는 항상 ‘까다롭다’거나 ‘특이하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당연히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만한 음식도, 갈 만한 곳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우유나 달걀도 먹지 않는 완전 채식주의자를 뜻하는 ‘비건(vegan)’에게는 더더욱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발간된 지 11년이 지난 지금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먹는 것은 물론 입는 것이나 쓰는 물건에서도 비건 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비건은 가장 ‘힙’한 라이프스타일로 떠올랐다.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비건푸드가 ‘미래식량’으로 대접받으면서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식물성 마요네즈나 우유·베이커리 등을 개발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채식 전용 레스토랑만도 300여곳에 이른다.
◇채식주의·비건·비거니즘=채식주의자도 먹는 음식의 범위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다. 동물성 식재료가 조금이라도 섞인 음식은 아예 먹지 않고 채소와 과일만 섭취하는 완전 채식주의자를 비건이라고 한다. 육류는 먹지 않지만 유제품만 섭취하는 경우 ‘락토(lacto)’ 베지테리언, 계란만 섭취하는 경우 ‘오보(ovo)’ 베지테리언이라고 한다. 비건은 육류는 물론 우유·계란 같은 동물의 알, 심지어 꿀도 먹지 않는다. 특히 비건은 단지 먹는 것만이 아니라 실크나 가죽처럼 동물로부터 얻은 원료로 만든 옷이나 액세서리, 동물실험을 하는 화장품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라이프스타일의 성격이 짙으며, 이러한 생활양식을 ‘비거니즘’이라고 부른다.
현재 국내에서 완전 채식을 하는 비건 인구는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비건푸드를 비롯한 비건 제품의 시장 규모는 이보다 더욱 크게 잡을 수 있다. 채식주의자가 아닌 일반 소비자들도 비건 제품에 대해 건강하고 윤리적이며 품질이 좋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살충제 계란, E형 간염 소시지 등 먹거리 안전과 관련한 이슈가 불거지면서 비건푸드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채식을 실천하는 연예인들의 일상이 방영되기도 하면서 비건은 트렌디하고 힙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이미지까지 얻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채식의 불모지와도 같던 우리나라에도 관련 산업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운영 중인 채식 전용 레스토랑 및 베이커리는 300여곳으로 5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푸드테크 스타트업들은 식물성 우유냐 계란을 개발하고 있고 대기업들도 비건푸드 제품 출시를 시작했다.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비건 바람’=육류 위주의 식습관은 건강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환경파괴의 원인으로도 지목되고 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식품으로 각광 받는 것이 바로 비건 식품이다. 식품 업계는 이러한 비건 식품을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연구개발과 제품 출시를 서두르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비더로켓시즌3 대상을 받으면서 사업을 시작한 ‘더플랜잇(ThePlantEat)’은 순식물성 대체식품을 개발하는 푸드 스타트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더플랜잇의 첫 제품은 계란을 사용하지 않은 마요네즈. 현재는 온라인을 통해서만 판매하지만 최근 이마트에서도 제품을 입점시키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더플랜잇은 지난달 롯데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선정되기도 했다. 6개월간의 창업지원 이후에는 롯데 계열사와의 협업도 이뤄진다.
더플랜잇은 계란 없는 마요네즈에 이어 이르면 다음달 비건 샐러드드레싱을 출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식물성 우유도 출시한다는 목표를 가졌다. 더플랜잇 관계자는 “꼭 비건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은 부모님들이 우리 제품의 주요 구매자”라며 “계란 알러지나 유당 불내증 등 건강상의 이유로 식물성 대체식품을 찾는 사람 또한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조찬회의 요거트’로 이름을 알린 수제 요거트 가게 ‘밀키요’도 이르면 이달 내로 비건요거트를 출시한다.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식물성 유산균으로 두유를 발효시켜 요거트로 만들었다. 윤용진 밀키요 대표는 “유럽이나 미국에는 마트에서도 비건용 식품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않다”며 “비건 중 직접 요거트를 만들어 드시는 경우도 많지만 맛과 퀄리티를 내기가 쉽지 않다”고 출시 배경을 선명했다. 밀키요 비건 요거트는 국내 유기농식품 유통업체와 프랜차이즈는 물론 백화점에서도 입점 러브콜을 받고 있다.
대기업 가운데서는 신세계푸드가 지난해 9월 계란과 우유·버터 등 동물성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비건베이커리’를 개발해 주요 스타벅스 매장과 스무디킹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특히 신세계푸드는 국내 업체 중 최초로 영국채식협회(Vegetarian Society)로부터 비건베이커리 인증을 획득했다. 출시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고객들의 반응이 좋아 스타벅스에는 비건베이커리를 6~8개 품목 추가할 예정이며 신세계푸드가 운영하는 백화점 내 베이커리인 베키아누보·딘앤델루카 및 조선호텔 베이커리에도 비건베이커리를 판매할 계획이다.
김창은 신세계푸드 베이커리팀장은 “세계적으로 베지테리언은 5억명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이제 시작이지만 많은 사람이 해외여행이나 매스컴을 통해 비건 제품을 접하고 있으며 관심도 커지고 있다”며 “비건 제품을 원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제품 개발 및 신규 원재료 발굴을 통해 식품 기업의 차세대 먹거리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