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식 비핵화’라는 표현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려하겠다는 북한을 어르기 위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16일(현지시간) ‘트럼프식 비핵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급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트럼프식 비핵화’라는 신조어의 등장에 우려감을 나타냈다. 북미 핵 담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쇼’로 전락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점에서다. 그간 미국 정부는 대북정책 목표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보여주기식 결과물을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핵 감축 등 북한의 입장이면서 미국 안보 측면에서 그럴싸해 보이는 수준의 합의에 그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불완전한 비핵화의 덫에 걸리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트럼프의 ‘쇼’, 불완전한 비핵화 가능성 제기=워싱턴포스트(WP)는 16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전임자들이 실패한 북한 이슈에서 승리를 선언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며 “북미 정상회담을 자신의 새로운 ‘유산(legacy)’으로 만들려는 그의 욕망이 비핵화 협상의 본질을 흐리는 합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니얼 러셀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트럼프 대통령은 ‘디플로테인먼트(외교를 뜻하는 ‘diplomacy’와 오락 ‘entertainment’의 합성어)’라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냈다”며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이 쇼의 정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싱가포르 회담은 엄청난 규모의 군중을 끌어모으겠지만 이는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는 매우 다른 결과물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문을 두고 이미 북한이 실질적인 의미의 CVID가 아닌 핵 감축 정도의 낮은 수준에서 협상을 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더해 NYT는 ‘리비아식 모델’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을 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분위기도 전했다. 대북 강경파인 볼턴 보좌관의 입지가 좁아진다면 북한과의 협상은 보다 수월해지겠지만 한반도 비핵화도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디테일’ 없는 북미 합의, 韓에는 최악=최근 워싱턴을 직접 다녀온 국내 전문가들의 시각도 유사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소장은 “한국과 달리 미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감이 크고 비핵화 합의보다는 과정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고려, 즉 선거 셈법에 따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비핵화 합의는 어떻게든 이뤄내겠지만 실무 차원의 검증·사찰·폐기 등 ‘디테일’까지 염두에 두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다. 진 소장은 “철저하지 못한 합의가 이뤄지면 한국이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청와대는 17일 북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북미가 입장 차가 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서로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비핵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있어 북미 간 의견 차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이 북미가 핵동결로 갈 수 있다는 취지로 최근 언급한 데 대한 생각을 묻자 “기본적으로 완전한 핵 폐기가 공동 목적으로 거기에는 흔들림이 없다”고 답했다. 또 강 장관은 이 자리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하느냐’는 윤상현 자유한국당 의원의 질문에 잠깐 뜸을 들인 뒤 “예”라고 답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정영현·변재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