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스타 영화

[리뷰] '버닝' 청춘,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자라면서 본 게 있는데 애를 낳겠냐.

출산율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가 돼버리고, 어머니는 소일거리하며 관절이 나가 약을 달고 살았다. 20~30대가 봐온 평균적인 가정이다. 낙수효과? 기업은 이윤이 넘치면 이익 잉여금으로 돌려 주주배당하기 바쁘고 내 주머니에는 10원짜리 하나 안 들어온다.”


“서울 4년제 대학 졸업하니 140만원 준단다. 대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시험을 만들더라. 왜 만들었냐 어차피 낙하산 쓸거면서. 서울 집값은 18평에 3억원이 넘는다. 140벌어서 언제 집사라고. 나 한몸 보전하기 힘든데 마누라 새끼까지 까고 살라고? 사회가 청년들을 거세시켜놓고 이제와서 노예 부족해서 애 낳으라 하면 낳겠냐.”




막막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공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른들이 거짓말했다. 평생 모아도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렵다. 어릴 적 꿈은 그저 꿈으로만 남았다. 그들이 욕심으로 빚은 청춘은 너무 일찍 많은 것을 잃었다. 보통사람, 거세가 된 청춘에 어른들은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Burning, 타오르다. 비닐에 불을 붙이면 눈 깜짝할 새 불타 사라져버리듯 다 태워버리란다. 미련 따위 남겨두지 말고. 부와 명예 그리고 헛된 욕망까지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그리고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던졌을 때 비로소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영화는 욕망을 잃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평범하다는 축에 끼지 못할 종수(유아인)는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과 우연히 만나 이성에 대한 욕망과 부에 대한 질투를 얻게 된다. 그리고 노을처럼 사라진 해미를 찾는 과정을 통해 그 욕망과 질투에 대한 허무함을 알아가는 여정에 선다.

해석의 여지가 많다. 범위가 너무 커 만명이 보면 만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보편적인 해석은 종수와 해미, 벤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하나 더, 해미와 벤이 실존하지 않는 ‘상징’이라는 가정 하에 바라보면 영화를 관념적으로도 풀어낼 수 있다.



해미가 설명하는 아프리카 부시맨 용어에 따르면 해미는 리틀헝거(배고픔), 벤은 그레이트 헝거(의미의 굶주림)다. 별다른 직업 없이도 좋은 집에 살고 외제 스포츠카를 모는 벤은 종수에게 “(직업은)놀아요. 취미는 낡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라며 매번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벤과 그의 친구들 앞에서 카드빚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해미는 신나게 아프리카 여행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춤을 춘다.

정작 리틀헝거인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를 흉내내는 춤에 벤과 일행은 박수치는 것도 잠시, 웃다가 지루해한다. 장난감이 된 듯한 해미의 역할은 벤의 하품과 함께 끝난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라 ‘연기처럼 사라진다’


해미가 사라진 후 벤을 찾은 종수 앞에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도 해미처럼 벤과 삶의 결이 다르다. 벤과 일행, 그리고 억지로 끌려온 종수 앞에서 그녀는 해미가 그랬듯 중국여행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놓는다. 모두의 반응은 이전과 같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듣는 듯 하지만 결국 벤은 하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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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관계에 집중해보자. 종수와 해미, 벤에게는 일종의 계급차가 존재한다. 막대한 부를 가진 이들이 보통사람을 바라보는 시각, 그들과 어울렸다 생각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실종된다. “연기처럼 사라졌어요. 걔 돈 한푼도 없어요”라며 벤은 슬쩍 웃는다.

신분상승을 꾀하지만 결국 권력과 부를 지닌 이들의 놀잇감에 지나지 않는 현실과 꼭 닮았다. 모 재벌 3세가 신입사원 교육을 받으며 쓴 “말은 동기지만, 결국 그들과 다른 길을 가게 될 나”라는 글과 묘하게 겹친다. 벤 역할에 캐스팅된 스티븐 연은 한국어가 매끄럽지 않고 미국인이라는 인상 덕분에 등장인물간의 괴리감을 극대화한다.



해미와 벤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이야기는 욕망의 성장과 소멸에 집중된다. 해미는 귤 까는 판토마임을 하며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고 말한다. 해미는 종수의 자아, 벤은 그의 욕망이다. 벤을 향해 ‘젊은 사람이 뭐하는데 이리 잘 사냐’는 종수의 동경은 마약에 함께 취하며 발가벗겨진다.

욕망은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걸 종수는 잘 안다. 더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해미의 사진을 보며, 그녀의 침대에서 자위하며 아무도 모르게 그 욕망을 분출할 뿐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옷을 불태우며 관계를 단절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는 사라진 해미를 찾아 비닐하우스를 뒤지고 또 뒤진다. 자신의 욕망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분노는 결국 파격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버닝’의 메인 포스터 속 해미는 어둡게 그려졌다. 멀리서 보면 실루엣인지 실제 인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종수에게 얼굴을 비치지 않는 해미의 고양이, 과거 우물에 빠졌는데 종수가 구해줬다는 해미의 이야기도 등장인물의 실존 여부를 뒤섞는 장치가 된다.

영화는 부와 명예, 그리고 욕망. 눈에 보이는데 잡을 수 없는 것들을 선망하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로 결론지어진다. 그들을 따라가면, 그들과 어울리면 나도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이들 모두 노을처럼 사라진다. 이 고통과 허무함을 극복해 낼 방법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배운 적 없다.

청춘이라 불리는 이들이 점차 잃어가야만 하는 것을 끌어낸다. 의도와 상관없이 주어진 조건, 노력해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 그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것들 모두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탕발린 말도, 시덥잖은 위로도 하지 않는다. 그저 활활 불태워버리라고 한다.

늘 비교받고, 경쟁하고, 한번 패배하면 인생 전체가 무너지고, 꿈이 직업이 되는 세상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청춘이라는 낡은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리라고. 그러면 어쩌면 정말 나 자신을 찾아 하고픈걸 해볼 수는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아주 은유적이고, 간접적이며, 알 듯 모를 듯 은근하게, 그렇게 라이터를 건넨다.

/서경스타 김진선기자 sestar@sedaily.com

김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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