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10회 분량으로 20개월 딸과 아빠가 떠난 스위스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이번 스위스 여행은 지난해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루체른, 베른, 체르마트, 생모리츠, 취리히를 둘러본 8박9일 여정입니다. 딸과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 ‘용자’ 아빠는 혼행(혼자여행)을 즐기며 전세계 44개국을 다녀온 자칭 중수 여행가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딸과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긍정적 효과와 더불어 엄마가 이제 안심하고 딸을 아빠에게 맡겨두고 주말에 외출해버리는 ‘주말 독박육아’의 부정적 영향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10년 전 ‘혼행’을 줄기차게 다닐 당시 혼행이 대중화될 것이라 예측 못 했는데 앞으로 10년 뒤에는 아빠와 자녀만 떠나는 여행이 혼행처럼 익숙해 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기를 시작합니다.
어느덧 입사한 지 만 10년이 넘었다. 귀차니즘과 더불어 ‘구관이 명관’이라는 철학 아래 회사를 쭉 다니다보니 회사 근속 10년을 넘겼고 10년 근속휴가라는 선물을 받게 됐다. 평소 휴가와는 다른 의미가 있는 만큼 가족여행으로 유럽이나 가볼까. 아내에게 말했더니 시큰둥하다. 그녀는 농반 진반 아니 진90%에 가까운 말로 우리 20개월된 딸만 데리고 갔다오랜다. 한참 고민을 하다 스위스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스위스라면 전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리스트에 북유럽국가들과 늘 어깨를 나란히 하면 등장하던 나라가 아니던가. 게다가 나라가 작으니 이동구간도 짧고 네팔, 볼리비아, 모로코 등과 달리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항공권은 현금 7만원에 해결했다. 어떻게? 여행을 줄기차게 다니다보니 스카이팀 마일리지가 어느덧 9만을 넘었고 2018년께 2만 마일 이상이 소멸될 예정이었다. 보너스항공권을 검색하니 기가 막히게 스위스 일정이 나왔다. 12월 9일 토요일 출발해서 16일 일요일 오후 4시에 한국에 도착하는 완벽한 9일 여정이었다.
이렇게 20개월된 딸과 아빠가 둘만 떠나는 여행이 시작됐다. 일정은 철저하게 딸과 다녀도 고통스럽지 않은 코스로 짰다. 사실 관광코스보다 더욱 큰 고충은 오른손엔 유모차, 왼손엔 캐리어를 끌고 다녀야 하는 하드캐리 상황이었다. 유모차를 끌어 본 사람들은 이 고충을 안다. 유모차가 균형이 잘 안 맞아서 한손으로는 방향전환이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여행시 이용하는 경량 유모차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긴 북유럽과 더불어 가장 살기 좋은 스위스가 아닌가. 방법은 있었다. 이동은 철저하게 기차로 다니고 숙소는 기차 코앞으로 하면 된다. 유럽은 도심의 센터가 기차역이고 기차역 앞에는 늘 호텔들이 많으니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다.
두 번째는 그래도 관광이다보니 여기저기 다니긴 해야 한다. 그러나 내겐 유모차가 있지 않나. 그래서 유모차가 못 가는 곳을 대비해 아기 포대기를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아기의 까다로운 식성을 우려해 3분 야채죽, 아기음료 등등도 열심히 챙겼다.
결과적인 얘기였지만 아기 유모차 빼곤 나머지가 아무 쓸모도 없고 짐만 돼서 아주 귀찮았다. 스위스는 북유럽과 더불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곳답게 유모차로 못 가는 곳이 없어 10.6킬로의 딸을 포대기로 둘둘 매서 다닐 필요가 전혀 없었고 우리 딸은 야채죽보다는 크로아상을 미친 듯이 더 좋아했다. 조식에 크로아상 3개는 기본 해치우는 먹성녀였다.
가장 유용했던 물품은 스위스의 겨울(빙하기에 접어든 한국보다는 훨씬 따뜻했다)에도 유모차를 끄는 게 힘들지 않게 해 준 장갑과 집에서 출발하기 직전 불현듯 생각나 챙겼던 교촌치킨의 고객증정품 ‘셀카봉’, 로이커바트의 온천에서 신나게 동영상을 찍게 해 준 스마트폰 방수팩이었다.
드디어 D-데이. 오른손에 유모차, 왼손에 대형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아스팔트여서 일단 핸들링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항공기 탑승을 기다렸다. 24개월 미만 아기를 대동한 승객은 비상구 옆 가운데 좌석(베시넷이 설치 가능한 곳)으로 배정해준다. 마침 이날 항공기가 널럴해서(비수기는 비수기구만) 비상구 옆 가운데열 좌석 3개 중 우측열에만 내가 앉고 나머지는 비었다.
승객이 모두 탑승한 뒤 항공기가 주기장을 떠났지만 웬일인지 출발을 안 한다. 그러더니 기장의 안내 멘트가 나온다. “중국 영공이 혼잡해 통과 허가가 안 나서 출발을 못 하니 1시간 정도 지연된다”는 것이었다. 전세기도 아니고 정기운항편인데 좀 어이가 없었다.(나중에 알고보니 중국이 전세계 자원을 빨아들이는 메카였을 뿐 아니라 항로도 다 중국 영공으로 통과하도록 해 중국 영공의 트래픽잼은 일상화된 일이었다.) 우리 딸의 항공기 체류 시간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1시간이 늘어났으니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우리 딸은 우려와 달리 이륙을 기다리는 도중 셀카를 찍을 때마다 빵긋빵긋 웃으며 여행체질임을 마구마구 드러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12시간의 비행을 20개월의 아기가 잘 버틸까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무난하게 비행했다. 비행후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승무원이 아기바구니를 설치해줬고 우리 딸은 거기서 잠시 놀다가 바로 취침 모드. 밥도 편하게 먹고 심지어 영화까지 봤다.
내가 탑승한 대한항공 취리히행이 말이 직항이었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내린 뒤 일부 승객을 내려주고 재정비한 뒤 떠나는 형태였다. 대한항공 상파울루 노선이 LA도착한 이후 승객이 모두 내리고 재탑승한 뒤 떠나는 것과 같다. 비엔나까지는 무사히 내렸는데 또 한번 이착륙을 겪어야 하니 우리 딸이 칭얼댈까 슬쩍 걱정이 밀려왔다. 항공기에 재탑승하는데 뒷 좌석의 할머니 한 명이 말을 건넨다.
“아기가 울면 도와줄까 했는데 너무 잘 있어서 내가 도와줄 게 없네요”
우리 딸은 비엔나에서 취리히까지 가는 항공기 안에서도 얌전히 보낸 뒤 무사히 취리히 공항에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