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직원 20여명 규모의 제약업체에 들어갔다. 경영상황이 좋지 않아 경리까지 그만둔 회사에 들어가 경리 업무에 영업·기획 등 ‘일당백’으로 일했다.
입사 9년 만에 대표이사로 취임했지만 회사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과감하게 주력 사업을 접고 마진율이 높은 염모제로 방향을 돌렸다. 국내 헤어코스메틱 분야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훈구(61·사진) 세화피앤씨(252500)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이 대표는 28일 서울 문정동 본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염모제 브랜드인 ‘리체나’와 헤어·보디케어 브랜드인 ‘모레모’를 투 톱으로 내세워 올해 500억원 매출을 달성하고 오는 2020년 1,000억원 매출로 두 배 성장을 일구겠다”며 “세계 헤어코스메틱 시장에서 로레알과 웰라에 이어 글로벌 톱3의 반열에 오르는 게 최종 목표”라고 밝혔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332억원이다.
세화피앤씨의 전신은 지난 1965년 설립된 서광약업사다. 개인사업체로 등록했다가 1976년 서광제약이라는 이름의 법인으로 전환했고 1978년 세화제약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고려대 기계공학과 75학번인 이 대표의 첫 직장은 유공(현재의 SK이노베이션)이었다. 지인의 요청으로 세화로 옮겼을 때 그의 연봉은 5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 세화제약의 주력 상품은 상처소독제와 간단한 복용약이었다. 매출의 35%는 염모제가 차지했다.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경리가 그만두는 통에 경리 일까지 떠맡으며 1년 365일 휴일 없이 일했다. 1994년 회사를 인수하며 대표이사로 올라섰다. 한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게 되면서 그에게는 무거운 숙제가 하나 생겼다.
그는 “당시 400곳에 가까운 제약업체들이 난립해 있었고 업체 간 과당경쟁이 심해 대부분의 업체들이 적자를 감수하고 영업을 하는 실정이었다”며 “마침 제약업체로서 허가기간이 만료되는 시기였는데 계속 제약사업을 끌고 갈 것인지, 다른 쪽으로 사업을 전환할 것인지 기로에 섰다”고 회고했다.
오랜 고민 끝에 제약업 허가서를 제출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업은 전체 사업의 35%를 차지하지만 마진율이 좋았던 염료제였다. 당시 일본의 비겐 브랜드를 들여온 염료제가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했지만 제약처럼 업체들이 난립하지 않은 만큼 충분히 시장 개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염모제와 화장품으로 사업을 변경하고 7분 만에 염색되는 ‘세븐스피디’를 론칭했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1997년 말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주요 거래처가 부도가 나거나 거래를 취소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 해외 시장을 개척할 요량으로 터키 전시회 참가 신청을 했는데 직항마저 없어졌다. 성지순례로 터키를 향하는 여행팀에 포함돼 가까스로 이스탄불로 날아갔다.
이때 터키에서 ‘헤나’를 만난 것을 이 대표는 사업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꼽는다. 그는 “재래시장에 갔더니 커리 가루 옆에 푸른 색 가루가 수북이 쌓여 있어 통역에게 물었더니 ‘헤나’라고 하더라”며 “터키 여성들은 밤에 헤나를 물에 개어 머리에 바른 후 잠을 자는데 다음날 일어나면 머릿결이 좋아진다는 설명을 듣고 귀가 번쩍 트였다”고 말했다.
당시 전시회에 참가한 유럽 업체들도 앞다퉈 헤나 성분의 트리트먼트를 내놓고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제품을 사 들고 돌아와 연구팀에 헤나 성분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결과는 실망이었다. 당시 제품에는 머릿결을 좋게 해줄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헤나’라는 존재는 이 대표의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2003년 일본산 헤나로 만든 염모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대표는 의구심을 품고 염모제 성분을 분석했다. 오히려 기존 염모제에 비해 유해한 화학성분이 잔뜩 들어 있었다. 결과 보고서를 들고 식품의약품안전청(지금의 식품의약품안전처)을 찾아갔더니 담당 과장이 깜짝 놀랐다. 일본 제품에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 대표는 터키에서 접한 여성들의 고운 머릿결이 다시 생각났다. 약 1년에 걸친 연구 끝에 독자적인 헤나 나노 공법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헤나의 핵심 성분인 ‘로소니아’는 모발 단백질인 케라틴과 결합해 손상된 모발을 치유하고 윤기를 주며 항균과 살균 작용으로 두피 질환까지 개선하는 성분”이라며 “기존 헤나 추출공법으로는 0.02%밖에 뽑지 못하지만 우리는 0.24%로 10배나 끌어 올렸다”고 설명했다.
2004년 국내 최초로 파우더 타입의 헤나 염모제인 리체나 파우더를 선보였다. 곧이어 인삼·홍삼 추출물과 헤나 추출물을 섞은 샴푸와 트리트먼트까지 내놓으며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당시 회사 앞에 홈쇼핑 직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제품 공급을 요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위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국내 대형 화장품 업체가 헤나 성분에 망간이 많이 들어 있어 인체에 유해하다는 보도자료를 대대적으로 뿌린 것이다.
이 대표는 “주요 공중파의 저녁 메인 뉴스로 나가면서 주문 취소가 밀려들었다”면서 “구리나 아연처럼 망간 역시 인체에 꼭 필요한 영양 성분인데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보도해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됐다”고 말했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식약처가 먼저 나서 부처 홈페이지에 망간의 유용성을 설명하는 게시물까지 올렸지만 이미 부정적인 보도가 퍼져나간 후였기에 사태를 되돌릴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2005년으로 예정했던 기업공개(IPO) 계획도 접고 신제품 개발과 해외 시장 개척에만 힘을 쏟았다. 절치부심 끝에 2008년 업계 최초로 샴푸형 염모제를 출시하고 2011년에는 거품형 염모제를 내놓았다. 지난해까지 리체나 시즌8을 내놓으며 후속작을 이어갔다. 지난해 9월에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스팩)와의 합병을 통해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며 볼륨을 키웠다.
이 대표가 올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은 모레모 브랜드의 확장이다. 지난해까지 염모제가 주축인 리체나가 매출의 80%를 차지했지만, 올해는 이를 역전시켜 모레모의 매출 비중을 80%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전략이다.
‘모어 모이스처(More Moisture)’라는 의미의 모레모에는 샴푸와 워터 트리트먼트, 보디워시, 보디로션, 보디미스트, 클렌징폼, 페이셜크림 등이 들어간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막·심해 등 지구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원료를 찾아내 황금 배합을 연구한 끝에 탄생한 역작이라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항노화물질 에페드라닌K(마황근추출물) 등 극한 환경에서 찾아낸 핵심 원료들은 수분과 보습 효능에 탁월한 강점을 갖고 있다.
이 대표의 최종 목표는 로레알·웰라·슈바츠코프가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헤어코스메틱 시장에서 ‘톱3’에 오르는 것이다. 그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50년 넘는 세월 동안 기술 개발을 통해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았던 저력을 무기로 도전할 것”이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사진=송은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