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소기업 간 특허 분쟁은 어쩔 수 없이 ‘유전무죄·무전유죄’로 끝나는 측면이 있어요. 중소기업의 이런 불리한 입장을 국가가 소송비용 지원 등 정책적으로 더 적극 뒷받침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대전 특허법원에서 만난 조경란(58·사진) 특허법원장은 대·중소기업 간 특허소송에서 중소기업의 패소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더 강하게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며 이렇게 당부했다. 중소기업은 경제력·정보력이 떨어지다 보니 특허 출원부터 소송 단계까지 허술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어 대기업을 이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조 법원장의 진단이다.
중기 ‘특허-기술’ 혼동 사례 많아
대기업 상대 1심 패소율 90% 달해
공익법무단·국선대리인 확대 필요
실제로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 특허심판원에서 대기업과 특허소송을 벌인 중소기업의 1심 패소율은 무려 89.9%에 달했다. 2심을 심리하는 특허법원에 오더라도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중소벤처기업부·특허청 등 정부기관이 중소기업 소송 자문을 위한 공익법무단 운영과 특허심판 국선대리인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지만 이 같은 지원 정책은 앞으로 더 확대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조 법원장은 “대기업은 별도 법무팀을 둬 특허 출원 단계부터 제3자가 권리를 침해할 수 없도록 일을 촘촘하게 처리한다”며 “소송 때도 유능한 대리인을 앞세워 집중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승소율이 높다”고 진단했다. 이어 “반면 중소기업은 특허와 기술을 혼동해 기술 발명자가 특허권으로 모두 보호받는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소송에서 중대한 오류가 된다”며 “자금력이 약한 중소기업의 우량기술에 대해 국가가 특허 출원·소송 비용을 지원하는 방안도 필요하지만 ‘좋은 특허’ 확보에 대한 중소기업의 인식 전환도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허법원은 전국의 특허심판을 관할하는 고등법원급 전문법원이다. 1998년 3월 사법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설립돼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주로 거절사정유지 심결, 특허무효심판 심결, 상표등록취소심판 심결, 심판청구서 각하 결정 등 1심 격인 특허심판원의 심결이나 결정에 대한 불복소송을 다룬다.
‘국제재판부’ 연착륙이 최대 과제
판결문 일본식 용어 더 개선할것
2월 취임한 조 법원장은 특허법원 20년 역사에서 첫 여성 수장이다. 최근에는 여성 재판장 비중이 대폭 늘어났지만 조 법원장 세대에는 그 수가 상당히 드물었던 게 사실이다. 조 법원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법원장으로서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그는 “균형과 정의를 추구하는 직업 성격상 판사 사이에서는 성차별이 거의 없는 편”이라며 “그러나 후배 여성 판사들에게 내가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도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한다”고 말했다.
조 법원장은 무엇보다 올해 특허법원의 최대 과제로 오는 6월13일 출범하는 ‘국제재판부’의 연착륙을 들었다. 국제재판부는 지적재산(IP) 소송이 점점 글로벌화하는 추세를 감안해 외국어를 사용하는 소송당사자에게도 공정한 재판 기회를 주기 위해 도입되는 제도다. 비영어권에서는 사실상 한국이 처음으로 시도한다. 판사 자원이 우수하고 분쟁 기간이 짧은 한국 사법부의 특성상 잘 정착하면 국내 판결 결과가 같은 사안에 대한 다른 나라 판결에 선제적인 기준점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제재판부에서는 실시간 통·번역사를 두고 소송대리인이나 당사자가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이미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들을 중심으로 법원행정처에 관련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하고 대법원 규칙을 마련했다. 유학 경험이 있고 영어 의사소통에 능한 판사 3명씩을 배치해 2개의 합의부도 구성했다.
조 법원장은 이와 함께 일본식 용어가 유독 많이 사용되는 특허 관련 판결을 우리식으로 순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펼쳐 일반인과의 소통 간극을 줄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특허법원의 경우 일본식 기술용어 사용이 유달리 심해 같은 법관이 봐도 이해 안 되는 판결문이 많다”며 “그나마 최근 5년간 순화 작업이 많이 이뤄졌는데도 아직 완성됐다고 보긴 어려워 개선 작업을 더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