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대학 年 20조 지원하지만
개발도상국식 쉬운 연구만 몰두
“생산성·효율성 상당히 떨어져
文정부 도전적인 연구 장려해야”
정부가 연 20조 국가 R&D(연구개발) 자금을 정부출연연구원과 대학, 기업에 지원하고 있으나 생산성과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지난 2016년 전년도 국가 R&D 예산을 분석한 결과, GDP(국내총생산) 대비 비중은 4.29%(2014년)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나 산업통상자원부의 R&D 예산 투입 기업의 10%가 한계기업이고, 각 부처 R&D 사업에서 창출된 우수특허 비중도 민간의 절반에 그친 바 있다.
물론 경제논리로만 접근한 분석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정부 예산이 1982년 9조5,781억원에서 올해 429조원으로 45배 증가하는 동안 국가 R&D 예산은 85배나 급증했다는 점에서 더딘 R&D 성과에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많다. 과학기술계는 “휴대폰·디스플레이·반도체 등의 눈부신 발전에 물리학·화학·수학 등 자연과학이 뒷받침됐다”고 자긍심을 표하면서도 “문재인정부의 과학기술 혁신 드라이브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도전적인 연구를 장려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은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회장 이명철)·한국공학한림원(회장 권오경)·대한민국의학한림원(회장 정남식)이 공동개최한 ‘국가 R&D 혁신전략’ 토론회에서 “연구자들이 실패하면 안돼 결과가 뻔한 계획서를 제출한다”며 “중간에 우수한 연구결과가 안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보장된 연구비를 다 소진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풍토가 국가 R&D의 비효율 주범 격으로, 연구자가 성공이 예정된 쉬운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고 정부도 맞장구를 쳐온 과거 ‘개발도상국식 R&D 생태계’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는 후속 연구비를 타기 위한 쉬운 연구에 매몰돼 국가 R&D 과제 성공률이 무려 95~98%에 달하지만 기술사업화 성공률은 20~30%에 그친다. 유 총괄부원장은 “일본은 연구자가 5년간 성과가 없어도 웬만하면 5년을 더 지원해 꾸준히 연구하며 노벨상도 많이 받지 않느냐”며 “도전적인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R&D 자금의 기획·심사·평가 기준을 달리해 현실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차국헌 서울공대 학장은 “국가 R&D 혁신은 탈관료주의에서 시작한다”며 선진적 연구환경 조성, 전략적인 R&D 조정,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의 조직역량 확대, 연구 자율성 보장, 세계적 연구기관 육성 등을 촉구했다. 윤석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원장은 “개인평가가 주기가 짧아 중장기 연구에 애로가 있다”며 “출연연이 장기도전·공공연구 기반을 다지기 위해 기관별로 인건비 비중을 차별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박소정 이화여대 화학과 교수는 “해외 우수연구자를 우리나라 대학에 유치하더라도 소모적 행정업무, 과도한 수업부담, 예측이 힘든 연구비, 정량적 평가 등으로 성과를 내기 힘든 구조”라고 꼬집었다. 탑다운 중심 연구보다 연구자 중심 자유공모형 연구 확대가 필요하다는 게 박 교수의 지적이다.
연구과제 심사 개선의 목소리도 높다. 고재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인지과학전공 교수는 “정부의 제도 변화가 현장 연구자에게 혁신적이라고 와닿지 않는 게 현장 분위기”라며 “연구과제가 과학기술 논리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정치나 연구자 자산에 의존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질타했다. 그는 또 과제에서 떨어진 연구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심사위원 공개를 주문했다.
박상욱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과거 추격기에는 정부가 정한 답이 있는 연구개발을 수행했다”며 “선도적인 연구를 하게 되면서 규제가 과학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규제 개선을 촉구했다.
산학연 협력과 융합연구, 벤처 생태계의 선순환도 주요 과제로 꼽혔다. 장재수 삼성미래기술육성센터장(전무)은 “삼성만 해도 국내에만 연구자가 6만명이 넘고 R&D 투자가 연 16조원을 넘지만 기업은 기초·원천기술을 하기 힘든 속성이 있다”며 “산학연의 협력을 촉진해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신규사업 업무를 할 때 현지 전문인력이 창업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면 대기업이 인수해 더 큰 기업으로 키우는 게 부러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송시영 연세대 교수는 “보건의료를 비롯해 연구 현장에서 융합과 창의력이 필요하지만 연구비로 인위적이고 한시적인 융합만이 존재하는 현실을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