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온천욕을 한 덕에 꿀잠을 자고 아침을 맞았다. 스위스로 출발하기 전부터 고민했던 건 과연 로이커바트에서 숙박을 하느냐 마느냐였다. 로이커바트에서 숙박을 하지 않는다면 베른에서 당일치기로 오는 형태의 일정이 된다. 이 경우 캐리어는 호텔에 두고 유모차만 끌고 로이커바트로 오면 돼 고생은 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온천을 한 뒤 다시 돌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한다.
나의 선택은 이동할 때 힘들더라도 로이커바트에서 1박을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건 ‘신의 한 수’였다. 눈밭에서 캐리어와 유모차를 밀고 끄느라 ‘하드캐리’한 날을 보냈지만 저녁에 온천욕을 즐기며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만족도는 더욱 높았다. 호텔 알펜테름에서는 유료 온천뿐 아니라 투숙객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온천이 별도로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가벼운 마음으로 20개월 수아와 함께 온천욕장을 들렀다. 실내온천은 작은 풀장과 비슷한 형태여서 특별함이 없었지만 야외 온천장은 풍광이 끝내줬다. 전날 베른에서 휘몰아쳤던 눈보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이날 로이커바트의 아침은 따뜻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하얀 눈옷을 입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야외 온천장은 고즈넉하고 심신을 편안하게 했다. 게다가 아침이어서 그런지 온천욕장에는 손님도 없었다. 마치 야외 온천장을 전세 낸 것 같았다. 릴랙스(Relax)~ 릴랙스 휴가의 참맛을 느끼는 아침이었다.
상쾌한 온천욕을 마친 뒤 호텔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체르마트로 떠나는 여정을 시작한다. 로이커바트에서 체르마트까지는 대략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숙소에서 로이커바트 버스정류장까지는 걸어서 약 9분 정도. 전날 그 고생을 하며 올라왔던 길을 이제 거슬러 돌아가야 한다. 인도에 제설작업이 잘 됐는지 살펴보기 위해 호텔 정문을 나서니 호텔 이름이 새겨진 승합차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싶어 호텔 프런트데스크에 “셔틀로 버스정류장까지 갈 수 있냐”고 물어보니 직원은 “물론 가능하다”고 답한다. 비용을 물어보니 이럴수가...
“공짜에요(It‘s free)”
어제 도대체 뭘 한걸까. 왜 눈늪(유모차 바퀴가 구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많이 쌓여 마치 늪과 같음)에서 진격 또 진격하며 호텔에 온다고 고생을 한 걸까. 호텔에 전화 한통화만 하면 됐던 것을… 21세기는 정보의 시대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새긴다.
오전 11시 30분. 셔틀 탑승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으려니 유모차 안에서 놀던 수아는 어느새 꿈나라에 빠져들어 있다. 운전사가 탑승하라고 손짓을 보내길래 짐을 싣고 유모차에서 수아를 뺀 뒤 승합차에 올랐다. 9인승 승합차는 투숙객을 가득 채운 뒤 출발했다. 전날 산악행군을 연상시켰던 도로는 제설작업이 대부분 이뤄져 있었고 셔틀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빨리 로이커바트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로이커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옮겨 탔다. 수아는 여전히 즐거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편한 버스여행이 됐다. 산길이 구불구불한 탓에 어지러웠던지 전날 버스에서 칭얼댔던 수아가 이날은 편하게 자고 있었다. 나는 창밖 풍경을 즐기며 로이커역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어떤 블로거는 로이커바트를 드라이브할 때 주변 풍경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스위스 여행 중 최고의 기억이 됐다고 평하기도 했다. 나도 격하게 동의한다. 작은 마을과 설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정말 끝내줬다.
로이크 기차역에 내린 이후에는 또 번거로운 짐꾼의 일상이 시작된다. 캐리어를 밀고 유모차를 끌고 플랫폼으로 이동한 뒤 청기백기 게임하듯 캐리어 올리고 나 내리고 유모차 올리고 객차 들어가고… 체르마트를 가려면 로이크역에서 기차를 탄 뒤 비스프에서 내려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지금까지 이동해왔던 것처럼 하면 되는데 문제는 전날 눈늪에서 캐리어를 옮기다 철퍽 넘어뜨렸더니 캐리어 손잡이가 그만 고장나 버린 것이다. 캐리어 손잡이는 완전히 다 빠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쑥 들어간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아 그립감이 영 좋지 않았다. 이곳 스위스에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내린 최고의 결론, 유모차를 한손으로 가슴 앞에서 밀고 캐리어를 엉덩이 뒤로 질질끄는‘삼위일체’ 형태로 이동해야 편한데 손잡이가 고장나서 질질끄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결국 유모차를 오른손, 캐리어를 왼손으로 미는 불완전한 형태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히 기차를 갈아타고, 유모차를 내리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스위스 사람들의 친절함을 또 느끼고 우리는 체르마트에 당당히 입성했다.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체르마트는 청정산악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휘발유 차량 진출입을 금지시켰다. 이곳은 오로지 전기차만 다닌다. 중앙역 한켠에 택시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모두 전기차다. 테슬라전기차같이 폼나는 형태는 아니고 골프장용 카트를 연상하면 된다. 낯선 풍경이 인상적인 한편 환경보호에 대한 스위스인들의 의지와 노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곳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5분이 채 안 걸린다. 다행히 체르마트는 이날 햇볕이 쨍쨍하다. 눈은 쌓여있었지만 유모차를 이동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구글맵을 활용해 아주 쉽게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했다. 숙소는 깔끔했고 아기용 침대까지 미리 준비돼 있었다.
오후 2시. 본격적인 체르마트 관광에 나섰다. 이곳 관광의 핵심인 마테호른을 보는 방법은 3가지다. 가장 대중적인 방식은 톱니바퀴식 전동열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 도달한 뒤 맞은편의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사진 찰칵. 두 번째는 스키어들을 위해 마련한 곤돌라를 타고 해발 3,800미터의 마테호른 글래이셔 파라다이스전망대에 올라 또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찰칵. 마지막 방식은 인근마을인 로트호른이란 지역으로 간 뒤 트레킹과 피크닉을 하면서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찰칵.
마테호른과 함께 멋진 인생샷을 찍겠다는 생각에 체르마트 일정을 이틀 잡아뒀다. 수아로 인해 트래킹은 어려우니 첫번째와 두번째를 각각 하루씩 하기로 정했다. 가장 쉬운 코스인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를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스위스 여행 중 가장 날씨가 좋았던지라 즐거운 마음에 연신 하늘을 쳐다본다. 고르너그라트행 산악열차는 체르마트 중앙역 맞은편이어서 5분이면 도달했다. 내가 갖고 있는 스위스패스를 보여주면 고르너그라트행 산악열차는 5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21세기는 정보의 시대 아닌가. 한국에서 여행정보를 찾다 기막힌 정보도 알아냈다. 한국인은 고르너그라트관광 홈페이지에서 쿠폰을 출력한 뒤 제시하면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컵라면도 무료로 증정한다. 컵라면은 역시나 산에서 먹어야 제맛이지.
즐거운 기분으로 매표소로 갔더니 이게 뭔 일인가. 직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금 산악열차가 고장났으니 나중에 다시오라”는 것이다. 기차시각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모든 게 정리정돈 잘 돼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살기 좋은 나라 스위스에서 열차 고장이라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언제 이용할 수 있냐”고 다시 물었다.
“나도 모르겠으니 기다리든지 내일 오든지 하라”는 직원의 답은 또 한번 좌절(OTL)하게 만들었다. 시간약속 철저하고 사람 성실하고 티끌같은 부품들로 정교한 명품시계를 뚝딱 만드는 엔지니어의 천국 스위스에서 직원도 모르겠다니...
결국 플랜B로 바꿨다. 마테호른을 보는 두 번째 방법인 글래이셔 파라다이스 곤돌라를 타는 것. 오늘같이 날씨 좋은 날이라면 마테호른을 꼭 봐야할 것 같았다. 우리에게 내일은 보장되지 않으니.. 결과적으로 이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곤돌라를 타려면 체르마트에서 40분가량 걸어서 인근 마을 푸리(Furi)로 가야한다. 날씨도 좋으니 산책 삼아 유모차를 끌면서 천천히 걸었다. 푸리 마을에 들어서니 관광객 한 무리가 사진촬영에 흠뻑 빠져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의 하늘을 쳐다보니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상징인 삼각뿔모양의 산꼭대기 마테호른이 짠하고 보이지 않는가.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볼 때보다 더 반가운 기분이었다. 그땐 너무 힘들어서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는.
푸리 마을에 접어드니 오르내리는 곤돌라마다 스키어들이 잔뜩 있다. 유모차를 끌고 매표소로 갔다. 이곳 역시 스위스패스는 50% 할인이다. 직원에게 자신있는 목소리로 “마테호른 글래이셔 파라다이스 1장”을 달라고 하니 직원의 표정이 묘하다. 그녀는 “아기가 몇 개월이냐”고 묻더니 “스위스법상 48개월 미만의 아기는 거기까지 못 간다”고 말한다.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녀는 “트로케너 슈테그(Trockener Steg)까지는 갈 수 있으니 거기까지 가면 어떻냐”고 제안한다. “거기도 뷰가 좋냐”고 물으니 엄지손가락을 쳐든다. 곤돌라는 꽤 큰 편이어서 유모차째로 실을 수 있었다. 대부분 스키나 스노보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순수한 관광목적은 우리 밖에 없는 듯 했다. 곤돌라는 산 중턱의 몇몇 마을을 지나 슈바르츠제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면에 보이는 뿔모양의 산꼭대기. 마테호른이 바로 눈앞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념샷을 찍으려고 보니 수아도 눈을 크게 뜨고 마테호른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명장면을 눈에 담고 있다니 기특하다. 찰칵찰칵 사진을 숱하게 찍었더니 곤돌라는 방향을 틀어서 어느덧 트로케너 슈테그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테호른 글래이셔파라다이스행 곤돌라를 갈아타기 위한 장소일 뿐 별다른 인상을 남기진 못 했다. 이곳 실내 건물에서 수아는 우유를 충전하고 나는 초콜릿바를 충전한 뒤 하행 곤돌라에 몸을 실었다.
푸리로 다시 내려왔더니 마테호른 꼭대기에 구름이 앉아 있다. 박목월 시인의 시(詩) ‘나그네’의 한 구절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구절이 연상됐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로스트치킨가게가 보여 반마리를 포장했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챙겨온 음식과 함께 치킨을 먹었는데 수아가 치킨의 절반 이상을 해치웠다. 이럴줄 알았으면 치킨 한마리를 살 걸 그랬나… 즐거운 체르마트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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