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경제·금융일반

[토요워치] 수소차 시동만 걸어놓고 주행 못하는 한국

韓 수소전지 선발주자 美·日에 한참 뒤처져

2005년 만든 마스터플랜도 13년째 낮잠

美·獨·日 '꿈의 연료' 생태계 구축 잰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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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서부 웨일스의 글로모건주 스완지에서 지난 1811년 태어난 법률가 윌리엄 로버트 그로브. 판사였지만 여가에 화학실험을 즐기던 그는 우연히 수증기가 고열의 백금에 닿으면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는 현상을 발견한다. 이를 본 그의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물을 전기로 분해하는 것과 반대로 수소와 산소를 반응시키면 전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1839년 그는 자신의 추론을 입증해냈고 최초의 연료전지인 ‘그로브전지’가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바 ‘수소시대’ 탄생의 전주곡이었다.

발판은 마련했지만 사실 그로브의 연료전지는 반쪽짜리였다. 수소가 연료도 아니었지만, 촉매제인 백금도 비싼데다 거대하고 효율도 낮았다. 결국 실용화에 실패한다. 오늘날 수소연료전지의 원형은 그로부터 100여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등장했다. 1982년 영국의 공학자 프랜시스 토머스 베이컨이 개발한 산화수소전지가 주인공이다. 그는 1959년 2톤 무게의 지게차를 움직일 수 있는 5㎾ 연료전지를 만들어내 실제 시운전을 해 보이기도 했다.


베이컨이 만들어낸 이 수소연료전지는 곧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의 주목을 받았다. 소비에트연방이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쏴 올리자 충격을 받은 미국이 달 탐사에 몰두하던 시기다. 달에 보낼 우주선에 가장 적합한 에너지원을 찾던 중 같은 무게에서 당시 최고 성능의 전지보다 8배 많은 전기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액화 수소연료전지가 세상에 나온 것. 닐 암스트롱을 태운 아폴로11호의 동력이 바로 수소연료전지였다. 베이컨의 특허권을 사들인 미국 군산복합기업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스가 나사와 대규모 계약을 맺었고 이후 1990년대 들어 바야흐로 수소연료전지 시장이 활짝 열리게 됐다.

수소가 ‘검은 황금’인 석유 시대에 종언을 고할 ‘꿈의 연료’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수소는 우주의 75%를 구성하는 물질이라 고갈될 우려가 없다. 온실가스 배출량도 ‘제로(0)’다. 일본이 1980년 설립한 신에너지개발기구(NEDO)를 중심으로 수소연료전지 연구에 박차를 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독일 다임러가 세계 최초 수소차인 ‘NECAR1’을 내놓은 때도 1994년이었다(자동차용 수소엔진은 폴란드의 발명가 루돌프 에렌이 1930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동력회의에서 처음 발표했지만 차로 양산되지는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수소시대’에 대한 열망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2002년 3월 국회연설에서 “연료전지 자동차와 가정용 연료전지 시스템을 3년 안에 실용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2003년 1월 국정연설에서 “수소연료전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유망하고 혁신적인 기술을 대표할 것”이라며 수소에너지 개발에 120억달러(약 12조원)를 쏟아붓는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널리 알려진 미래학자 제러미 러프킨의 ‘수소혁명’이라는 책도 2004년에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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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선진국의 200여년, 그리고 일본의 40년에 가까운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수소시대에 대한 준비는 15년에 불과하다. 우리 정부가 수소경제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것은 2001년 당시 산업자원부가 처음으로 수소차를 국책과제에 포함하면서부터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2005년 청와대 관저에서 현대자동차의 수소차를 타본 뒤 “적극적으로 밀어드리겠다”는 말을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에게 건넸다. 이때 뿌린 씨앗이 2013년 현대차의 세계 최초 수소차 ‘투싼 ix35’ 양산으로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수소차를 제외한 생태계 구축은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2005년 참여정부는 친환경 수소경제 구현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며 수소경제 원년을 선포했다. 오는 2040년까지 수소에너지 비중을 15%로 높이겠다는 게 당시 마스터플랜의 골자다. 수소차보다는 연료전지 산업 육성 등 생태계 육성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이후 13년이 지났지만 수소산업 관련 인프라는 여전히 열악한 수준. 연료전지 시장 점유율이 선진국 대비 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직은 발전용에서 미국에 이어 48.5%를 점유하고 있지만 건물용에서는 실적이 ‘제로(0)’에 가깝다. 수송용도 미국 58.7%, 일본 37.7%에 한참 못 미치는 1.6%에 불과하다. 그나마 기술력에서 앞선 수소차도 충전소 등 인프라 구축이 늦어지면서 일본에 따라잡힌 상황이다.

정부가 수소차 확산을 위해 충전소를 늘리고 올해 마련하는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수소를 수송 분야의 공식 에너지원으로 넣는 방안을 논의 중이기는 하지만 수소시대 준비를 위한 생태계 구축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전문가들은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지금이 수소시대를 앞당길 수 있는 ‘변곡점’이라고 진단한다. 재생에너지의 막대한 잉여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한 뒤 수소를 저장·운반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만큼 연료전지 기술만 확보하면 수소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실제로 독일과 미국에서는 이렇게 생산한 수소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수요처로 보내는, 이른바 ‘파워투가스(Power to Gas)’ 기술 개발이 한창이다. 정책당국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서동혁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수소산업은 초기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야 민간의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다”며 “2013년 에너지기본계획 법안에 수소사회 실현을 명문화한 일본처럼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 의지를 시장에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종=김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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