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생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를 관찰해보면 하나의 특징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주고받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친구끼리 밥을 함께 먹으면 일대일이 철칙은 아니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서로 한 번씩 돈을 낸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해도 매번 사는 사람과 매번 얻어먹는 사람의 관계는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내가 열 번 밥을 샀는데도 친구가 한 번도 사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만나기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주기만 하고 다른 한쪽이 받기만 하는 국제 관계는 없다. 선진국이 최빈국에 무상원조를 하면 그에 상응하지 않더라도 반대급부가 있기 마련이다. 말만 무상원조이지 글자 그대로 무상원조는 없는 것이다.
최근 연일 계속되는 폭염을 보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주고받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구상의 기상이변은 화석연료를 과다하게 사용해 발생한 지구온난화 현상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낮의 폭염과 밤의 열대야가 지속할 때 사람들은 부채 바람으로 부족하면 선풍기를 켜고 선풍기 바람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에어컨을 틀게 된다. 부채는 사람의 힘만 들이면 되지만 선풍기와 에어컨은 아직도 화석에너지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폭염과 열대야가 지속하면 더 많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게 되고 결국 지구온난화 현상이 심화하게 된다. 현대인은 인간과 환경이 상생의 방식이 아니라 상극의 방식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근대 이후로 화석에너지를 무절제하게 사용했고 환경은 침묵을 끝내고 지속적으로 과부하의 반응을 보이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과 환경이 서로에게 부담을 주는 상극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상생의 방식을 생각해볼 때가 됐다.
전국시대 사상가 묵자도 사람과 하늘 사이의 관계를 고민했다. 사람은 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놓고 사태가 불리하게 펼쳐지면 하늘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사람과 하늘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됐다. 사람은 하늘에게 늘 요청하는 입장이고 하늘은 인간의 요청을 다 들어줄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묵자는 사람과 하늘의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해법을 모색했다. “사람은 하늘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면 하늘도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한다(아위천지소욕·我爲天之所欲, 천역위아소욕·天亦爲我所欲).” 묵자는 사람이 하늘에게 일방적으로 요청하기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과 하늘이 각각 하고 싶은 것을 서로 이뤄주는 방식을 제안했다.
묵자의 해법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 하늘이 바라는 것을 하더라도 하늘이 어떻게 사람에게 호응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은 적실한 듯하지만 실제로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이 하늘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할 때 하늘이 자신에게 호응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하늘이 사람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했더라면 애초에 사람과 하늘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다면 사람은 먼저 하늘이 바라는 것을 하고서 하늘이 자신을 도와주기를 기다리게 된다.
묵자의 해법을 지구온난화에 적용해보자. 사람이 지구에 폭염과 열대야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일방적으로 요청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람이 먼저 자신의 생활 방식이 지구온난화를 완화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속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지구온난화의 방향을 바꾸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더 많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해 폭염과 열대야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하늘은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천불위아소욕·天不爲我所欲).” 왜냐하면 “사람이 하늘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불위천소욕·我不爲天所欲).” 폭염과 열대야가 연일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그 둘을 어떻게 피할까만 생각한다. 둘이 물러난다면 폭염과 열대야가 왜 그렇게 심각하게 지속됐는지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그렇게 도출된 실천 방안을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