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때론 '악역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정상범 논설위원

인터넷은행 진영논리에 갇히고

핀테크마저 중국에 밀리는 현실


인기없는 정책도 국민 설득하고

역발상으로 혁신국가 일궈내야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이 인터넷전문은행의 규제혁신 현장을 찾아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천명한 것을 놓고 말들이 많다. 문 대통령이 영국 자동차산업의 발목을 잡았던 ‘붉은 깃발법’을 거론하며 규제 완화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문 대통령의 절실함을 느꼈다는 이들이 많았다. 여러 부작용을 보완해야 한다며 기술적인 문제를 거론한 것도 세간의 여론을 의식한 조심스러운 행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촛불 정부가 집권 2년 차를 맞아 결국 관료와 재벌에 휘둘린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재벌의 사금고로 전락한다거나 저축은행 부도사태가 재연된다는 등 해묵은 논란도 여전하다.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는 일찍이 도입된 인터넷은행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낡은 은산분리 규정에 묶여 특혜시비에 휘말리고 있으니 시대착오적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이날 핀테크를 널리 알리겠다며 스마트폰의 QR코드로 물품을 직접 구매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신기술처럼 보이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대중화 단계에 이른 것들이다. 중국에서는 알리바바의 알리페이와 텐센트의 위챗페이가 십년여 전부터 모바일 결제시장을 파고들면서 일반 매장에서 카트나 계산대도 필요없이 QR코드를 찍고 결제하고 있다. 유커가 우리나라를 찾아 알리페이로 계산하는 것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됐다. 법률에서 금지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를 고수한 덕택에 민간이 간편 결제시장을 주도해온 것이다. 갖은 규제에 막혀 뒤늦게 결제시스템 혁신에 뛰어든 우리의 모습을 보며 중국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 모를 일이다. 한때 정보기술(IT) 강국이라고 자부해왔던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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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뒤늦게나마 혁신성장을 위해 규제혁신에 올인하는 분위기다. 요즘 들어 청와대에서 실사구시나 규제 완화라는 말도 많이 들려온다. 정치권에서도 적극 거들고 나서 인터넷은행이 문재인 정부의 ‘규제 완화 1호’에 이름을 올릴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것은 지지층과 정권 일각의 반기업 정서다. 최근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삼성 방문을 놓고 재벌기업에 특혜를 주면서 투자와 고용을 독려하는 개량주의라는 얘기마저 나온다. 경제수장이 우리 대표기업의 공장을 찾는 일이 이리도 어렵고 불편해졌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백악관 집무실에 ‘모든 책임은 여기에 있다(The buck stops here)’는 팻말을 놓고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원자폭탄 투하, 한국전 참전 등 논란이 컸던 현안을 처리하느라 고뇌의 순간을 맞을 때마다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밀고 나간 것이다. 모름지기 국가 지도자란 고독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나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등이 모두 이런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왔다.

미증유의 위기를 맞은 지금이야말로 경제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절박함과 전환기적 역발상이 절실한 시점이다. 때로는 인기가 없고 지지층의 비난을 받더라도 기꺼이 악역을 피하지 않는 지도자도 필요하다. 비록 선한 의도를 가진 정책이라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과감히 뜯어고치고 국익을 위해 소신과 다른 결정도 기꺼이 내려야 한다. 국민을 설득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희생을 감내하도록 만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정책이란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다. 제한된 자원과 시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정부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는 혁신을 가로막는 제도를 개혁해 포용적이고 자발적인 시장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만 민간의 창발성이 살아나고 국가의 경쟁력도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회장은 평소 “소선(小善)은 대악(大惡)과 닮아 있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고 했다. 지도자라면 큰 대의를 위해 작은 자비를 버릴 줄 아는 결단과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는 얘기다. 과연 우리에게는 국민이 원한다면 악역을 꺼리지 않는 지도자가 얼마나 있는가. /ssang@sedaily.com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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