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밖 동십자각에서 삼청로 쪽으로 향하다 마주하게 되는 법련사는 올여름 내내 사찰 입구에 연꽃을 내놓았다. 연잎이 물을 덮은 항아리가 24개. 이쪽 꽃봉오리가 삐죽 나온다 싶으면 이내 저쪽 봉오리가 벌어져 거의 매일 한두 송이씩 만개한 연꽃을 볼 수 있었다. 진흙탕에 뿌리 두고도 더러움 묻히지 않고 핀다는 연꽃은 염천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 꽃 떨어진다 싶으면 저 꽃도 씨방 내보이며 꺾이지 않을 것만 같던 염제(炎帝·중국 고대 불의 신이자 여름의 신)도 흐르는 시간 앞에 밀려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런 연꽃은 ‘군자의 꽃’으로 사랑받았다. 깨끗한 마음 다잡고 청신한 눈으로 즐기고자 연꽃을 방 안으로 들였다. 큼지막한 백자 동이에 연을 심었더니 어느덧 연분홍 꽃이 만개했다. 넓게 펼친 연잎은 꼭 날개처럼 분 밖까지 뻗었다. 그림 그린 이는 김수철(1820년 무렵~1888년 이후). 언제 태어나고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뭣하나 제대로 알려진 것 없으나, 19세기를 풍미한 중인 출신의 화가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이 그림 ‘백분홍련(白盆紅蓮)’은 20폭짜리 화첩 ‘북산화사(北山畵史)’에 담겨 있다. 기미년 석관전사(石串田舍)라 적혀있어 1859년 지금의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이다. 북산은 김수철의 호요, 석관전사는 만년의 그가 동대문 밖 한적한 산 밑 돌곶이로 이사해 농사지으며 살았던 집이다.
연꽃 한 송이에 연잎도 한 장이지만 외로워 보이지도 허전하지도 않다. 그 향기가 어찌나 자욱한지 방을 가득 채웠고, 꽃의 자태가 상큼하면서도 우아해 여백을 넘어 화폭 밖까지 장악할 정도다. 부끄러움에 몸을 빼듯 살짝 옆으로 치우친 구도의 탁월함에다, 감각적 색채는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버드나무를 태워 만든 유탄(柳炭)의 스케치 자국이 투명에 가까운 색 밑으로 보일 만큼 맑은 그림이다. 꽃도 잎도 구구절절 그리지 않고 과감히 생략했다. 간결하고 세련되게 그 특징과 의미만 담았다. 한국적 추상회화는 이미 19세기 김수철에게서 시작됐나 보다. 김환기·유영국·이중섭·장욱진 등이 1947년에 결성한 ‘신사실파’ 작가들이 어쩌면 김수철의 그림을 본 것 아닐까. 화가 김수철은 시(詩)같은 함축의 묘미로 꽃을 그렸다.
그림집 ‘북산화사’에는 연꽃 말고도 각양각색의 꽃들이 담겨 있다. 분홍빛 해당화의 수줍은 미소를 그린 ‘해당함소(海棠含笑)’, 괴석을 사이에 둔 노란색과 자주색의 모란을 포착한 ‘자황목단(紫黃牧丹)’, 구불구불한 돌 틈으로 나온 황색과 자색의 국화를 표현한 ‘자황양국(紫黃兩菊)’ 등은 산뜻하고 담박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축축하게 늘어진 ‘노수단풍(老樹丹楓)’은 운치 있고, 보석처럼 흐드러진 ‘설중한매(雪中寒梅)’는 우아하다.
대부분이 꽃 그림인 화첩에 산수화도 몇 점 있다. 소나무 우거진 냇가 언덕에 남자 다섯이 모인 ‘송계한담(松溪閑談)’이 대표작이다. 당연할 법한 술병 하나, 안주 한 접시 없이 조촐하다. 솔잎 찍은 군청색이 채 마르기 전에 물 많이 머금은 담묵으로 덧칠하니, 푸른 기운이 퍼져나가 그 잔잔함 사이로 땀 식히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와 물(水)색을 닮은 푸른 저고리, 나무 둥치와 흙색을 닮은 붉은 저고리 차림의 사내들이 여유롭게 나누는 담소가 들릴 듯하다. 색(色) 자리를 먼저 잡고 그 위에 먹선으로 나뭇가지와 사람의 윤곽, 돌의 테두리를 그리니 청량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석관동 주변 돌곶이 어디쯤에서 이런 풍경을 찾겠나.
북산 김수철에 대해 분명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파격적인 구도, 과감한 생략의 ‘세한도’에서 느껴봄 직한 기이한 미적 쾌감이 제자 김수철의 그림에도 감돈다. 추사는 학문적 명성을 청나라까지 떨쳤으나 정변에 휘말려 제주로 귀양 떠났다. 9년의 제주 유배생활을 마치고 온 그는 이듬해인 1849년에 서예와 서화 부문의 제자 14명을 모아 실력을 겨루게 했고 그 글과 그림을 하나하나 품평해 ‘예림갑을록’을 엮었다. 그때 추사가 짚은 화가가 바로 김수철이며 허유,이한철,박인석,전기,유숙,조중묵,유재소까지 묶어 ‘화루(畵壘) 8인’이라 했다. 김수철의 그림을 펼쳐 놓은 스승 추사는 비 오는 날 풍경을 그린 ‘매우행인도’를 가리키며 “넣을 것과 뺄 것을 가려 구도를 배치하는 능력이 매우 익숙하고 붓놀림 또한 막힘이 없다”고 극찬했다. “색을 먹이는데 세밀하지 못했고 또 우산 받치고 가는 사람이 조금 환쟁이 그림같은 면이 있다”는 지적은 북산을 성장시키는 거름이 됐다. ‘계당납상도’를 보고는 “매우 좋은 지점들이 있다. 요즘 쉽게들 그리는 기법으로 그리지 않았는데 다만 홍염(烘染·그슬린 듯한 채색)이 과해 번짐이 좀 심한 듯하다” 했고, ‘풍엽심유도’를 두고는 “필의가 조금 거친 듯하나 매우 편안하다. 위치도 자못 좋다”고 평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조선 문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정조 시대를 지난 19세기는 거센 변화가 회오리처럼 일던 시기였다. 정선이 이룬 진경산수화가 쇠퇴하고 김홍도·신윤복이 이름 날리던 풍속화가 시들해질 무렵 ‘남종문인화’가 번성했다. 선비의 사유와 정신성을 중시하며 발전하던 문인화가 의외의 지점인 중인계층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중인은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오늘날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로, 문기(文氣) 못지않은 멋을 향유하며 여항(閭巷)문화를 이뤘다. 급부상한 신흥부유층을 만족 시킨 대표적 중인 화가가 김수철이며, 미쳤다 할 정도로 매화를 즐겨 그린 우봉 조희룡(1797~1859)과 환상적 화풍의 ‘매화초옥도’로 유명한 고람 전기(1825~1854) 등이 그의 친구였다.
김수철은 대여섯 살 아래 전기와 가까웠다. 원래 한약방을 했으며 요절한 천재화가인 전기는 그림 거래를 주선한 화상(畵商)이기도 했다. 그의 편지 묶음인 ‘전기척독집첩’에 “부탁하신 북산의 절지도(折枝圖)는 빨리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이 사람의 화필이 워낙 민첩하여 아마도 늦어질 염려는 없을 겁니다”라고 적혔는가 하면 “북산의 병풍그림을 어제서야 찾아왔습니다” 등의 기록이 전한다. 김수철의 당대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에는 일본인 컬렉터들이 김수철의 그림을 애호했고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일제 때 북산의 ‘수국도’를 구해 현재 민예박물관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그런 김수철을 두고 미술사학자 이동주(1917~1997·정치학자 이용희 동일인물)는 “인상파적인 산수·화훼”를 그리며 “우리 옛 그림에 보이지 않던 새 감각미를 창설”한 ‘신감각파’라 했고, ‘한국회화사’를 정립한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종래에 보지 못했던 참신하고 현대적인 감각을 풍긴다”며 ‘이색화풍’이라 평가했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북산의 작품을 “추사가 추구하던 문인화의 탈속한 경지를 남김없이 보여주는 그림”으로 봤고, 미술평론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감각에도 천분이 있다면 김수철은 감성의 천재화가였다”고 했다.
전문가들의 상찬일색인 김수철에 관해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많다. 그와 비슷한 화풍을 보이는 ‘학산 김창수’라는 화가가 있어 꽤 오랫동안 동생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러나 ‘유홍준의 한국미술사강의3’(눌와 펴냄)은 “2011년 동산방화랑에서 열린 ‘조선후기 산수화전’에 학산과 김수철 도장이 나란히 찍힌 작품이 나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됐다”고 주장한다. 김수철의 호가 젊은 시절 ‘학산’에서 ‘북산’으로 바뀌었고 이름도 김창수와 김수철(秀哲,秀喆)로 여럿 사용했다는 얘기다. 김수철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미술사학자 최열이 “이화여대박물관에 소장된 ‘천한백옥도’가 술자년 작품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1888년까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김수철이 왕실이나 양반가에서 태어났더라면 이토록 흔적이 없었겠나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70여점 작품이 전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일탈과 초월이 산뜻하고 해맑게 화폭에 내려앉았으니 꽃은 졌어도 잔향은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