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시장은 전통 강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다. 보쉬·지멘스·일렉트로룩스·월풀·밀레 등 5개 업체가 프리미엄 제품군과 일반 제품군을 모두 장악하며 높은 진입 장벽을 만들었다. 일반 가전 업계 1위로 군림하는 삼성전자라고 해도 브랜드 신뢰도나 유통망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특히 유럽은 ‘가구 중심’이란 빌트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가전의 기능뿐만 아니라 가구와 주변 공간이 얼마나 잘 어우러지는지가 소비의 절대적 판단 기준이 된다. 김현석 삼성전자 사장은 최근 독일 베를린 가전박람회(IFA 2018)에서 “미국 빌트인 시장은 디자이너들이 좌우한다면 유럽 시장은 가구 메이커들이 좌우하는 시장”이라며 “제품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가구와 매칭 안 되면 소비자들이 선택을 안 하는 굉장히 보수적인 시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이 같은 상황의 돌파구를 인수합병(M&A)에서 찾고 있다. 유럽 명품 가구 업체들의 인지도와 네트워크를 단숨에 확보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빌트인 시장 공략을 위해 현지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데이코를 인수한 바 있다. 미국 시장에서 빠르게 자리 잡으려면 현지 네트워크와 인지도를 보유한 업체 인수가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명품가구 업체 인수 추진은 전자 산업의 경계를 확장하는 장기적 투자이기도 하다. 가구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전자 산업과 다양한 협업이 이뤄지는 대표적 분야다. 명품 소파에 인공지능(AI) 음성인식 기능을 넣어 위치를 조절할 수 있고, 옷장에 얇은 디스플레이를 달아 영상을 즐기는 일도 가능해졌다. 2020년까지 모든 가전을 인터넷으로 연결하겠다는 삼성전자의 구상이 더욱 다양해질 수 있다. 빌트인 업계에선 이미 가구 업체와의 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LG전자의 경우 자사 프리미엄 빌트인 브랜드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를 이번 IFA 2018에서 선보이면서 유럽 명품 가구업체 발쿠치네·아클리아나 등과 협업했다. 이들 회사가 유럽 내 보유한 200여개 이상의 전시장을 활용해 LG의 인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특히 LG전자는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의 차별화 포인트로 ‘가전 + 가구’의 공간 솔루션을 내세웠다.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은 IFA 2018에서 “유럽 빌트인은 브랜드를 만드는 게 어려운 시장”이라며 “유럽은 가구점과 묶여서 빌트인이 판매되는 시장이라 공략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신희철기자, 베를린=한재영기자 hcsh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