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블랙록은 최근 해외에서 열린 한 기업설명회(IR)에서 투자자들에게 이 같은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블랙록은 현대차 그룹의 주요 주주로 다른 투자자에 미치는 영향이 큰 투자자다. 지난 5월 현대차 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시도할 때 직접 뉴욕을 방문해 블랙록 관계자와 접촉한 것도 이 같은 영향력을 고려해서다.
엘리엇은 지난 8월 14일 현대차 그룹에 서신을 보내 주요 계열사를 분할 합병하는 내용으로 지배구조 개편안을 제시했다. 현대모비스(012330)의 애프터서비스(AS)부분을 떼어내 현대차와 합병하고 모듈과 핵심부품사업은 물류업체인 현대글로비스(086280)와 합치는 방안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과 합당한 여건과 최적의 안이 마련되는 대로 모든 주주와 단계적으로 투명하게 소통하겠다”면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블랙록은 엘리엇의 요구가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을 압박해 시세차익과 배당 확대 등 주로 단기 투자자를 위한 것이라며 평가 절하했다. 블랙록은 현대차 그룹이 기업 가치를 올려 중장기 주가 상승을 이끌 수 있도록 명확한 대안을 내놓으라는 입장이다.
블랙록은 정의선 현대차 그룹 수석부회장이 최근 제시한 ‘모빌리티(이동성) 솔루션’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완성차 제조사에서 벗어나 자동차 산업과 정보통신기술(ICT)간 융합, 공유경제 확산에 맞춘 대안을 제공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현대차 그룹은 최근 미국의 모빌리티 서비스 전문업체 ‘미고’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고 인도·동남아·중국·호주에서 카셰어링과 배터리 공유업체 등에 잇따라 투자했다.
블랙록은 현대차의 이 같은 행보에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블랙록을 비롯해 장기 투자자인 슈퍼 롱 펀드는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에 동의하면서도 장기 투자자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오는지 명확하게 알기를 원한다”면서 “현대차의 1차 지배구조 개편이 실패한 것도 엘리엇의 주장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현대차가 장기적인 기업가치 상승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블랙록의 지적은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의 키를 쥔 국민연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연금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2대 주주이자 장기 투자자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쉽코드(기관투자자의 수탁자책임)를 강화하는 것은 엘리엇과 같은 단기 차익이 아니라 블랙록처럼 장기 차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민연금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 스튜어드쉽 코드 도입 방안 논의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헤지펀드가 아니라 슈퍼 롱 펀드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면서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목소리를 높이되 장기투자자라는 입장을 확실히 한다면 기업과 국민연금 운용수익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그룹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모비스 분할법인과 현대글로비스 합병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했지만 합병비율 적정성 논란에 휘말려 기관투자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최근에는 현대모비스를 분할 한 뒤 상장해 합병비율을 시장에 맡기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상장 과정이 오래 걸리고 시장에서 가격이 고평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성이 낮다는 반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