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31·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은 7회 초 2사 1루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하고는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홈 관중의 환호와 기립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현지 중계 카메라가 잡은 것은 관중석의 백발 신사였다. 푸른 스웨터를 입은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일어나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신의 왼팔’ 샌디 쿠팩스(83·미국)였다. 지난 1965년 26승, 1966년 27승 등 통산 165승을 쌓은 왼손투수 쿠팩스는 세 차례 사이영상(최고투수상)과 월드시리즈 우승 3회, 월드시리즈 최우수선수(MVP) 2회에 빛나는 전설 중의 전설이다. 명예의 전당에는 1972년에 헌액됐다.
‘빅게임 피처’ 류현진이 ‘신의 왼팔’을 일어서게 했다. 왼손투수 류현진은 5일(한국시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NLDS·8강·5전3승) 1차전에서 선발 7이닝 4피안타 무실점 호투했다. 올 시즌 가장 많은 104개의 공을 던지면서도 볼넷이나 몸 맞는 공은 하나도 없었고 삼진은 8개를 뺏었다. 1회 선두타자 족 피더슨의 선제 솔로 홈런과 2회 맥스 먼시의 3점포를 앞세운 다저스의 6대0 완승 속에 류현진은 1,459일 만에 포스트시즌 승리투수가 됐다. 햇수로는 5년 만이다. 이날 전 마지막 가을야구 등판인 2014년 10월7일 NLDS 세인트루이스전 6이닝 1실점을 포함해 류현진의 포스트시즌 통산 성적은 4경기 2승(23이닝 18피안타 17탈삼진 5실점)이 됐다. 평균자책점 1.96이다. 다저스 역사상 포스트시즌에 두 차례 이상 7이닝 무실점 투구를 작성한 좌완은 쿠팩스와 제리 로이스에 이어 류현진이 세 번째다.
류현진은 한국인 최초의 포스트시즌 1차전 선발, 에이스 클레이턴 커쇼를 대신한 1선발이라는 부담을 보기 좋게 뛰어넘었다. 정규시즌처럼 편하게 던졌고 정규시즌 막판 3연승을 더해 4연승을 달렸다. 편안해 보였지만 구속에서부터 남다른 각오가 읽히기도 했다. 2회 엔더 인시아르테를 상대로 올 시즌 던진 공 중 가장 빠른 시속 93.6마일(151㎞)의 강속구를 뽐내기도 했다. 104개의 공 가운데 직구는 42개. 직구 구속과 제구가 따라주다 보니 섞어 던진 체인지업과 커브, 컷 패스트볼의 효과도 배가됐다. 타석의 류현진은 4회 우전안타로 포스트시즌 첫 안타도 신고했다.
1회 2사 뒤 안타를 맞았지만 4번 타자 닉 마케이키스를 2루 땅볼로 들여보낸 류현진은 이때부터 5회 2사까지 12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했다. 5회 2사 뒤 연속 안타로 흔들리나 싶었으나 대타 커트 스즈키를 우익수 뜬공 처리하며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다. 하이라이트는 6회였다. 첫 타자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를 맞은 류현진은 볼카운트 2-2에서 회심의 직구를 던졌다. 류현진 본인도 삼진이라 생각한 한복판 직구를 주심이 잡아주지 않으면서 풀카운트에 몰렸고 이어 유격수 땅볼 때 매니 마차도의 실책으로 무사 1루를 허용했다. 류현진은 그러나 이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속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이 사이 도루를 시도하던 아쿠냐는 포수 송구로 2루에서 아웃됐다.
올해로 다저스와의 6년 3,600만달러 계약이 끝나는 류현진은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의 주가를 다시 한번 스스로 높였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류현진이 애틀랜타 타선에 수갑을 채웠다. 거장다운 활약을 펼쳤다”고 했다. 적장인 브라이언 스니트커 애틀랜타 감독은 “우리 팀은 그렇게 삼진을 많이 당하는 팀이 아닌데 (류현진의) 빠른 볼 제구와 체인지업에 내내 페이스를 찾지 못했다”고 했고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커쇼 대신 류현진을 1차전에 내보낸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올해 우리는 류현진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고 류현진은 우리가 희망하는 모든 것을 해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MLB닷컴은 다저스타디움 21이닝 연속 무실점 중인 류현진이 NLDS 5차전 선발로 나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경기 후 류현진은 “수술(2015년 어깨·2016년 팔꿈치)하고 나서 힘든 재활을 이겨내고 계속 마운드에서 던진다는 것만 생각하고 준비해왔는데 오늘의 결과가 나온 것 같다”며 기뻐했다. 또 “대단한 레전드 선수들과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