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데뷔 후 4시즌 동안 준우승만 6번. 골프선수 박결(22·삼일제약)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라는 화려한 경력 외에 뒷심 부족이라는 씁쓸한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선수였다. ‘필드 위의 인형’이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의 그는 의류 업체와 골프용품 업체들이 앞다퉈 명함을 내미는 인기 선수다. 하지만 우승은 남의 얘기 같았다. 한때 조바심에 답답해하기도 했던 박결은 올 시즌에는 우승 얘기를 물으면 여유롭게 웃어넘길 정도로 압박감을 내려놓고 있었다. 준우승 2번에 상금랭킹 25위. 올해도 이렇게 만년 기대주로 지나가나 하던 순간 첫 우승의 감격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28일 제주 서귀포의 핀크스 골프클럽(파72)에서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총상금 8억원). 일찍 경기를 마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습 그린에서 퍼트를 가다듬던 박결은 우승 확정 소식에 얼떨떨한 듯 미소를 짓다가 동료들의 축하 인사에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하염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가리느라 모자챙을 접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우승 없는 인기 선수’ 박결이 자신을 옥죄던 꼬리표와 깨끗이 작별했다. 3라운드까지의 성적은 이븐파 공동 10위. 8언더파 단독 선두 최혜용(28·메디힐)에게 8타나 뒤져 있던 박결은 마지막 4라운드에 무려 6타를 줄였다. 극적인 뒤집기에 성공한 그는 우승 뒤 바람 많은 핀크스GC에서의 경기에 대해 “오늘도 바람이 많았다. 내게 바람은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날 박결은 보기 없이 전후반에 3개씩 버디만 6개를 몰아치는 무결점 플레이를 보여줬다. 6언더파 66타를 보탠 그는 최종합계 6언더파로 5언더파의 배선우(24·삼천리)와 이다연(21·메디힐)을 1타 차로 따돌리고 상금 1억6,000만원을 손에 넣었다. 106번째 출전 대회에서 완성한 105전106기 드라마였다. 8타 차 대역전극은 KLPGA 투어 역대 최다 타수 역전 우승 타이기록이기도 하다. 서울경제 클래식은 지난해 김혜선(21·골든블루)이라는 신데렐라를 배출한 데 이어 2년 연속 생애 첫 우승자를 탄생시켰다. 박결은 “우승할 거라고 하나도 생각을 못 해 갑작스럽기도 하지만 꿈에 그리던 순간이다. 정말 기쁘고 행복하다”며 “신인 때 너무 주목을 받고 올라와 무조건 우승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많이 속상했는데 부모님의 격려로 버텨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2승·3승이 나오지 않더라도 톱10에 계속 이름을 올리는 꾸준한 선수가 되겠다”고 덧붙였다.
챔피언 조인 최혜용과 김민선(23·문영그룹)·김지영(22·SK네트웍스)의 치열한 선두경쟁에 조명이 집중되는 사이 박결은 조용히 타수를 줄여가며 한 계단씩 올라가고 있었다. 승부처는 17번홀(파3). 1타 차 공동 2위의 박결은 고급 세단이 상품으로 걸린 이 홀에서 홀인원이 될 뻔한 버디를 잡았다. 이로써 김민선과 6언더파 공동 선두. 그대로 박결이 경기를 마쳤을 때 김민선은 네 홀을 남기고 있었다. 버디를 잡을 만한 홀이 많아 이때만 해도 박결의 우승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이번에도 17번홀이었다. 김민선은 티샷을 오른쪽 벙커로 보냈고 벙커 샷으로 핀 1m 남짓에 붙였으나 이 파 퍼트를 넣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빠르게 마무리하려던 더 짧은 거리의 보기 퍼트도 놓쳤다. 순식간에 4언더파로 내려간 것. 김민선의 18번홀(파4) 두 번째 샷이 이글로 연결되지 않고 그린에 멈추면서 박결은 그제야 주변의 축하 물세례와 꽃잎 세례를 받았다.
1년6개월 만의 우승을 두드렸던 김민선은 10번홀(파5)에서 50㎝ 버디 퍼트를 넣지 못하는 등 1m 안팎의 퍼트를 서너 차례나 놓치면서 손에 잡힐 듯했던 우승을 내줬다. 라운드 초반 버디 2개와 보기 1개로 1타를 줄이면서 단독 선두를 달렸으나 12홀 연속 지루한 파 행진 뒤 더블보기로 무너졌다. 김지영· 박주영(28·동부건설)과 같은 4언더파 공동 4위.
3타 차 단독 선두로 나서 10년 만의 우승에 도전한 최혜용은 마지막 날 5타를 잃고 3언더파 공동 7위에 만족해야 했다. 최혜용은 2008시즌 유소연을 따돌리고 신인왕에 오른 선수다. 통산 2승이 있지만 2008년 이후로는 승수를 보태지 못했다. 2부 투어로 강등되는 등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최혜용은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올드팬들을 소환했다. 3라운드에 강풍을 뚫고 네 홀 연속 버디로 단독 선두에 올랐고 상금 65위에서 57위로 올라서며 시드 걱정을 다소 덜었다. 디펜딩 챔피언 김혜선은 2번홀(파3) 트리플보기를 16번홀(파5) 이글 퍼트 등으로 극복하는 등 3타를 줄여 2언더파 공동 10위로 마쳤다.
/서귀포=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