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앞둔 사람이 문득문득 느끼는 떨림을 가을비 직후 성큼 다가온 찬 공기의 시릿함에 비하겠는가. 그 싸한 긴장감은 수험생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며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이되고 전파되니, 아마도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가량은 이 으슬으슬한 긴장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당장 다음 주, 오는 15일이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일이니 말이다.
시험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이 옛 선비들이라 하여 덜 마음 졸이고 더 여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현종 5년이던 1664년 지금의 북한 지역인 함경도 길주에서 과거 시험이 열렸다. 한양이 아닌 지방에서 열린 일종의 별시(別試)였다. 그림은 조선 중기 최고의 도화서 화원 중 하나로 꼽히는 설탄(雪灘) 한시각(1621~1691 이후)의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길주목의 고사장 풍경을 그린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와 함흥성에서 진행된 합격자 발표 날을 담은 ‘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로 나뉜다.
우선 ‘길주과시도’를 보자. 그림 중앙부 건물 안쪽에, 한가운데 분홍 옷을 입고 앉은 이는 이번 시험의 총감독관인 김수항이며 좌우로 감독관들과 시험 진행상황을 기록하는 관리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그 옆, 감상자 입장에서 볼 때 그림 앞쪽의 관아 안뜰이 고사장이다. 좌우 양쪽에 초록잎 울창한 나무가 섰고 그 안쪽 마당에 단풍처럼 붉은 색 옷을 입은 십수 명의 문과 응시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소곤소곤 얘기 나누는 사람들, 먹을 가는지 물을 마시는지 분주한 이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시험 시작 전인가 보다. 기대와 포부, 미묘한 떨림이 넘실댄다. 이날의 시제, 즉 논술시험으로 ‘용흥강부(龍興江賦)’가 출제됐다. 용흥강은 함경남도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가는 강이니 지역성을 배려한 주제라 하겠다. 응시생들 앞에 노란 옷 입고 붉은 모자 쓴 군졸이 2명 서 있고 그 안쪽 전각에 감독관이 앉아있다.
문과 시험과 무과 시험을 모두 함축한 이 그림에는 등장인물만 110명에 달한다. 오른쪽이 무과 시험 현장이다. 그림에서는 말 타고 달리면서 5개의 목표물을 잇달아 쏘아 맞히는 기추(騎芻) 시험이 한창이다. 좌우 5개씩 10개의 목표물을 가르며 말 탄 응시자가 화살을 쏘고 있다. 과녁은 사람의 형상이다. 그 뒤로 4명의 사람들이 각각 무리 지어 앉아있다. 이들은 활이 명중했을 때 붉은 기를 올리는 사람과 북을 울리는 사람, 불발했을 때 백기를 올리고 징을 울리는 사람이니 일종의 시험관들이다. 활쏘기를 끝내고 들어가는 응시자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넉살 좋은 이도 있다. 그 아래쪽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무과 응시생들이 대기 중이다. 이들 무관 지원자들은 파란 옷을 입고 있는데 말을 살피는 이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실력을 흘끔거리며 관찰하는 이도 있다. 이 중 한 사람이 엉덩이를 움켜쥐고 왼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제 순서를 앞두고 긴장한 탓에 아랫배가 슬슬 아파 온 것일까. 짐작만 할 따름이나 해학적인 풍경이 정겹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 앞둔 사람의 마음도, 행동도, 다 비슷하다는 뜻이니 위안도 된다.
다음 그림은 ‘함흥방방도’. 마침내 당락이 결정됐다. 역동적이던 시험장과 달리 분위기는 좀 딱딱하다. 실은 잔치 분위기로 들뜰 만도 한데, 낙방자들을 위한 배려라고 치자. 관아 안쪽에는 임금이 내리신 어사화와 홍패가 놓여있다. 이날의 합격자는 문관 3명과 무과 300명이다. 보통 문관은 오른쪽에, 무관은 왼쪽에 자리 잡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에 문과 합격자 3명이 섰고, 왼쪽에는 무과 합격자들이 연신 호명되는 중이다. 문 밖에서 기다리다 제 이름이 불리면 안으로 들어가는 식이라, 아직 밖에 선 사람이 열 여섯 쯤 되고 줄줄이 입장하는 예비 무인들도 보인다. 담장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이를 구경하는 백성들이다. 여염집 아낙들은 선뜻 나가보지 못하고 창밖으로 귀만 내밀고 있다.
한시각의 이 그림에서 인물은 작기도 하거니와 간략한 선으로, 이목구비 생략된 둥글둥글한 얼굴과 몸통으로 묘사돼 있다. 그럼에도 인물의 고개 기울인 정도, 손의 움직임, 웅크린 등과 어깨의 방향 같은 세부묘사가 분위기와 감정까지 생생하게 전한다. 이 그림은 조선 중기 이후, 장차 나타나게 될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전개를 예고하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남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북새선은도’는 펼쳐놓은 폭이 7m에 달하는 대작이다. ‘북새’는 북쪽 변방 지역, 즉 함경도를 가리킨다. 은혜를 베푼다는 ‘선은’은 임금의 은혜를 뜻한다. 대체 임금이 북방에 어떤 은혜를 베풀었단 말인가. 때는 17세기 중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은 조선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박·서리 등의 이상기후와 자연재해가 빈발했다. 핍진한 시기 왕위에 오른 현종은 “오장이 타는 듯 차라리 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라고 토로할 지경이었다. 천재지변을 군주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니 그럴 만 했다. 민생을 살펴야 했던 현종은 이른바 ‘함경도 프로젝트’를 전개한다. 소외된 지역이자 경제적으로 낙후된 데다 유교적 통치이념도 덜 닿은 그곳에 관심을 쏟기로 했다. 게다가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를 전쟁까지 염두에 둔다면 외면해서는 안 될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지역 인재를 등용하고 민심을 끌어모으고자 과거 시험, 즉 함경도 별시를 단행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온몸으로 증언하는 게 바로 이 그림이다. 한시각은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도화서 화원이 됐고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이 될 정도의 당대 최고 실력파였다. 규장각이 소장한 의궤 제작에 참여한 화원을 일일이 짚어본 결과, 한시각은 총 22회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로 꼽혔다. 도화서 화원이 20명 안팎인데 그 중 기량 으뜸인 그가 지방 출장까지 나서서 기록화로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그림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박물관의 유물기록부에는 1913년에 일본인에게서 이 그림을 구입한 것으로 적혀있다. 그 후로 전시된 적 없이 수장고에 있던 작품을 찾아내 누가, 언제, 왜 그린, 어떤 그림인지를 발굴하다시피 한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조선 중기는 정치적으로 비록 시련기였으나 회화사에서는 높은 수준을 이룬 때로, 이 작품은 16세기와 17세기를 관통하는 전통이 어떻게 연속성을 갖는지를 보여준다”면서 “제작자인 한시각은 인물과 산수에 모두 뛰어난 화원이었다”고 평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1977년 박물관 특별전을 통해 작품이 빛을 봤고 연구도 이어졌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나중에 발견된 ‘북관수창록’에 북새선은도와 동일한 도장이 찍힌 것으로 미루어 같은 화가의 그림이며, 같은 계기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게 한 사람이 현종 임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임금이 보시는 그림에 화원이 도장을 찍는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고, 임금 앞에 그림을 올릴 때는 신(臣)자를 적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미술사 연구자 이경화 씨 등은 당시 함경도 관찰사였던 민정중을 유력한 발주자로 보고 있다.
이 그림은 기법 면에서 안견의 영향을 받은 점잖으면서도 웅장한 필치에 밝고 진한 채색의 청록산수 화풍을 두루 보여준다. 특정한 행사를 담은 기록화면서, 실제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풍경화이며, 그림 한 장 들고 성과 건물까지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지도이기도 했으며, 개성있는 인물 묘사에 탁월한 풍속화이기도 하다.
화가 한시각은 7명의 화원, 2명의 의관, 1명의 역관을 배출한 중인 명문집안 출신이었다. 1655년에는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한시각보다 앞서 일본을 다녀온 이가 바로 ‘달마도’로 유명한 화원 김명국이다. 빠르고 적은 붓질로 승려나 신선을 그린 ‘선종인물화’는 조선 중기의 특징적 그림인데 그 양대산맥이 이 둘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한시각의 ‘사립인물도’를 보면 부드러운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듯 살아 움직인다. 붓 몇 번 휘두르지 않고도 인물을 기가 막히게, 부드러우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정신성이 드러나는 그림은 특히 일본에서 인기였고 통신사 화원으로 갔던 김명국과 한시각은 지금의 ‘한류스타’ 못지않은 환영을 받으며 그림 얻으려는 긴 줄이 늘어지게 했다.
입시라는 게 세상을 향한 문을 열고 나가는 문지방이나 다름없다. 문지방 넘어서는 보폭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니 현재에 충실한 것이 최선이다. 돌이켜 보건대 분명한 것은 그건 그냥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었다는 것.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