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경이 만난사람 -오세중 변리사회장] 철학자 꿈꾸던 학생운동가..."아버지 보며 변리사의 길 알게 돼"

故김근태·이해찬과 민청련 창립 주도

이공계 제치고 38세에 '늦깎이 합격'

"요즘도 시간 날때마다 철학서 들춰 봐"

5일 오세중 대한변리사회 회장./이호재기자.5일 오세중 대한변리사회 회장./이호재기자.



오세중 회장은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지난 1995년 38세의 늦은 나이에 이공계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변리사시험에 도전해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합격한 30명의 변리사 가운데 인문 계열 출신은 오 회장을 포함해 단 세 명뿐이었다.

철학을 전공했지만 변리사 업계에서 생업을 꾸리게 된 것은 그의 핏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DNA 때문이다. 부친은 동네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였는데 평소 발명에 관심이 많았다. 손님이 없는 날에는 자신이 개발한 발명품의 특허출원서를 직접 쓰기도 했고 실제 특허를 보유하기도 했다. 오 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보기 드물게 아이디어가 많은 분이셨다”며 “약국 안에서 자신의 발명품을 흥이 나서 설명하기도 하고 관련 문서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변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오 회장이 뒤늦게 변리사의 길을 걷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학생운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탓에 남들처럼 공직이나 일반 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 1977년 긴급조치 위반에다 유신헌법 철폐 등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입학 첫해 제적당했다. 전공을 선택하지도 못한 채 군대를 다녀온 뒤 1980년 제적조치가 풀려 복학해 철학과를 선택했지만 또다시 광주민주화운동 유인물을 배포하다 붙잡혀 학교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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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회장은 학생운동 이후 고(故) 김근태 전 국회의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글솜씨가 남달랐던 그는 1980년대 초반 대학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던 ‘학생운동의 전망’을 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1988년 복학할 수 있었고 1991년 학업을 마쳤다. 하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정상적인 취업활동을 할 수 없었다. 선배나 동기들 가운데 정계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스스로는 정치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당시 주변에서는 정계로 간 선후배나 동기들이 많았는데 내 역할은 그분들이 원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뒤에서 그들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미래 시대에 우리나라에 필요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변리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 시국에 얽히지 않았다면 학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젊은 시절 인생의 풍파를 겪으면서 학문에 대해 열정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던 것 같아요. 1988년 복학하면서 평소 관심이 많았던 철학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죠. 책도 많이 번역했고. 요즘도 시간 날 때 간간이 철학서를 들춰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이나 논어는 지금 다시 봐도 새로워요. 재미있는 것은 고대에도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고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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