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잎과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가지마저 잃은, 뭉툭한 모양새라도 나무는 나무다. 오히려 켜켜이 쌓인 나이테, 짙고 굵직한 껍질이 지나온 세월과 여전한 생명력을 입증해주는 덕에 고고한 맛을 준다. 올해로 칠순을 맞은 소리꾼 장사익(69)의 소리는 그루터기같이 뭉툭한데 세월을 머금어 깊디깊은, 늙은 나무를 닮았다.
12일 서울 홍지동, 인왕산 자락과 북한산이 슬며시 만나는 그의 자택 창밖으론 울긋불긋한 단풍이 절정이었다. 오는 24~25일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이어지는 그의 콘서트 ‘자화상七’ 포스터와 기타가 놓여있지 않았다면 예인의 집보다는 산사라 해도 믿을법한 풍경이다. 텅 빈 듯 소담하게 꾸며진 2층 거실은 가을 풍경이 병풍 역할을 하고 넓은 찻상 위엔 다기가 가지런히 놓였다.
그는 매일 거실 창가에 앉아 찻물을 끓여 다완을 덥히고 식혀가며 찻잔 속 자연을 흡수한다. 휴대폰도 TV도 컴퓨터도 없는 고요한 방에서 그의 삶도 자연을 닮기 마련이다. 창밖 나무를 보던 장사익이 대뜸 노래를 했다.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이라고 노래하는 허영자 시인의 ‘감’이다.
“저 나무들 좀 봐요. 누가 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똑같이 피고 낙엽도 똑같이 지잖아요. 우리는 잘 익은 단감에게도 배울 게 있어요. 그게 자연의 선물이죠.”
장사익은 2년에 한번 꼴로 전국 공연에 나선다. 2년 전 콘서트 ‘꽃인듯 눈물인듯’은 성대수술 이후 그의 성공적인 복귀를 함께 축하하는 자리였고 이번엔 지난 세월과 삶을 되짚는 자리다. 이달 중 그의 9집 앨범도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달 밝은 밤 우물 속에 비친 얼굴을 미워하고 가엾어하고 그리워하던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을 되짚어 보고 싶을 때쯤 시어가 장사익의 가슴팍으로 들어왔다.
“고맙게도 이 세상 시인들이 우리네 삶을 모두 시어로 빚어놨어요. 누구에게나 시가 독하게 다가올 때가 있어요. 시가 한 번 내 안에 들어오면 그때부턴 계속 입으로 되내죠. 그러다 보면 하루, 어떨 땐 1년이 넘어야 가락을 입고 흘러나오는데, 내 안에서 버무려진 소리가 입을 타고 나오면 듣는 사람에겐 입체화된 이야기가 돼요. 공연이 끝나면 관객 각자가 자기만의 하얀 도화지를 들고 나가게끔 하는 게 제 일이죠.”
장사익은 데뷔 공연부터 매진 행진을 이어온 전설적인 소리꾼이다. 3,000여석에 달하는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이미 10여 차례 매진시켜온 것도 공연계에선 전설적인 기록이다. 그가 스스로 꼽는 비결은 짙은 페이소스에서 나오는 ‘씻김’이다. 슬픔도 한도 씻어내는 카타르시스의 무대에 관객들은 매번 그의 공연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젊고 예쁜 모습만을 보고 싶어하는데 백발 성성한 노인이 음의 고저도 없이 읊조리는 소리가 진짜 노래지요. 내 노래는 가지도 없이 뭉툭한 나무를 닮아갑니다. 기교도 없이 기둥 하나로 부르는 노래죠. 얼굴엔 세월의 나이테가 서고요. 그런데 세월이 담뿍 담긴 그 소리에 희로애락이 있거든요. 거기에 사람들은 삶을 되짚고 감동을 받지요.”
장사익은 세상을 등진 이들, 남겨진 이들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려주는 가수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아쉬운 것은 이달 초 타계한 신성일의 영정 앞에서 노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달 공연을 마치는 대로 전남 화순 요양병원을 찾아서 깜짝 콘서트를 열어드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떠나셨네요. 오늘 아침에도 선생님을 떠올리며 ‘뜨거운 침묵’을 불렀습니다. ‘너무나 벅찬 당신이기에 말 없이 돌아서 조용히 가련다’고요. 선생님께 들려드리려던 노래는 이번 공연에서 불러볼 참입니다.”
24~2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