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과 호남, 연세대와 고려대, 롯데와 해태. 모든 것이 정반대였던 최동원과 선동열. 둘은 라이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맞붙었다 하면 드라마틱한 승부를 펼쳤습니다. 나중에 ‘퍼펙트 게임’이라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두 선수의 맞대결은 큰 관심과 화제를 모았습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선수시절 총 3번의 선발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첫 대결은 1986년 4월 이뤄졌는데 당시 선동열이 1대0 완봉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4개월 뒤 최동원이 2대0 승리를 이끌며 패배를 설욕합니다.
그리고 1987년 5월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두 선수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이 경기가 ‘퍼펙트 게임’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날 경기는 연장 15회까지 무려 4시간56분 동안 혈투를 펼쳤지만 2대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습니다. 최동원은 연장 15회까지 60타자를 맞아 209개의 공을 던져 11피안타 7사사구 8탈삼진, 선동열은 56타자를 상대로 232개의 공을 던지며 7피안타 6사사구 10탈삼진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오후 2시에 시작된 경기는 해가 지고 조명탑에 불이 들어온 저녁 7시가 돼서야 끝이 났습니다. 치열했던 명승부가 승패를 가리지는 못했지만 두 선수는 여유가 넘쳤습니다. 최동원은 선동열의 손을 맞잡으며 “동열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한번 던져볼까?”하고 농담을 건넸고 선동열은 그런 선배에게 “형님 한번 해볼까요?”하며 웃음으로 되받아쳤다고 합니다.
사실 위의 3경기 말고도 둘의 대결은 한 번 더 있었습니다. 1987년 4월12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경기로, 이날 롯데 선발은 최동원, 해태 선발은 김대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대현이 경기 직전 팔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한 타자만 상대하고 곧바로 선동열과 교체됐습니다. 결과는 해태의 6대2 승리. 선동열은 9회까지 9피안타 3사사구를 허용하며 2실점만 허용했고 삼진 9개를 잡아냈습니다. 반면 최동원은 4회까지 볼넷 1개만 허용하는 완벽한 투구를 펼치다가 5회 3실점, 6회 3실점하고 7회 교체됐습니다. 선동열이 승리투수, 최동원이 패전투수가 됐지만 이 경기는 선동열이 선발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주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2011년 9월14일, 최동원이 53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 선동열은 빈소에서 “최동원 선배는 나의 우상이었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연투 능력은 아무도 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동원과 선동열. 야구팬들은 지금도 둘 중 누가 더 최고 투수였는지를 놓고 끊이지 않는 논쟁을 벌이지만 두 선수 모두 ‘국보급 투수’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투수의 뒷길이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국가대표 야구팀을 이끌던 선동열 감독이 지난 14일 전격 사퇴했습니다. 기자회견을 통해 선수선발 논란과 국감 증인출석, KBO의 대응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국보급 투수이자 삼성을 2번 우승시켰던 선동열 감독의 쓸쓸한 뒷모습이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황원종·오수경기자 wonjjang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