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제국주의의 두 얼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다’ 편이 전파를 탄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 정치계의 거물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 도착한다. 러시아 재무대신을 만나러 온 그가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순간,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의 총탄이 날아든다. 피격 30분 만에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 그를 저격한 사람은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저격 후 러시아군인에게 총을 건네주며 순순히 체포에 응하는 뜻밖의 행동을 보인다. 안중근이 자발적으로 체포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이토 히로부미, 그는 누구인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4차례 총리를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대한제국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한제국의 원흉으로 손꼽히는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정작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병합할 생각이 없었다? 공개적으로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병합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이토 히로부미. 과연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이토 히로부미의 민낯을 들여다본다.
▲ 이집트에서 날아온 제보
이집트 출신 유학생, 새미가 ‘역사저널 그날’ 스튜디오를 찾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통치에 대해 제보할 것이 있다며 찾아온 새미. 이집트와 이토 히로부미 통치전략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새미의 제보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정치를 알아본다.
▲ 두 얼굴의 일본 제국주의
한국 병합을 부인했던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그는 통감 재직 당시 한국 병합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고종의 양위식을 강제로 진행하고, 일본이 대한제국에 내정간섭을 한다는 내용의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등 병합의 기초를 닦고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1909년 6월, 그는 돌연 통감직을 사임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임한 배경은 무엇인가?
▲ 안중근이 꿈꾼 동양평화론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의 평화를 깨뜨렸기에 사살했다고 밝힌 안중근. 그는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동양평화론에서 안중근이 강조한 건 대한제국·청나라·일본의 3국 연합이었다. 감옥 안에서 일본에 복수하려 하지 않고 일본을 포용하며 같이 동양평화의 길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 안중근. 제국주의 사상과 대비되는 그의 동양평화론을 자세히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