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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일본, 고종에게 칼을 겨누다..경복궁 습격사건

1894년 7월 23일(고종 31년) 새벽, 총과 칼로 완전 무장한 일본군이 영추문을 부수고 경복궁에 무단 침입했다. 이들은 궁을 지키던 조선군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조선의 왕 고종을 포위하기에 이르는데.. 궁궐의 고요를 깨뜨린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사건 그 날 새벽, 조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1일 방송된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경복궁 습격사건을 재조명했다.


예고 없는 일본군의 난입으로 혼란에 휩싸인 경복궁! 궐 안으로 침입한 일본군은 궁을 지키던 조선군의 무기를 빼앗고, 고종 앞에 칼을 겨누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런데 당시 사건을 보도한 일본 신문의 기사 내용에는, 사실과는 정 반대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군이 조선 왕궁으로 향하는 도중 조선병 일행에게 사격 당했으며,

이에 응전 조선병을 물리치고 조선왕궁을 삼엄하게 지켰다.”


- 1894年 7月 25日, 마이니치 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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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에 따르면, 일본 측은 어디까지나 우발적 상황이었으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조선의 왕을 호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왕궁 습격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였다는 사실이 당시 청일전쟁의 전사(戰史)를 기록한 문서 초안을 통해 밝혀지며 그 실체가 드러났다.

경복궁 습격 이틀 뒤, 풍도 앞바다에서 조우한 청군 함대에 일본군은 뜬금없이 선제포격을 가한다. 그렇게 예고도, 명분도 없이 발발한 청?일 전쟁. 상대는 당시 동아시아의 맹주로 떠올랐던 막강한 군사력의 청. 일본이 군사 강국이었던 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어이없는 전쟁의 선전포고는 전쟁 발발 일주일 후에야 이루어진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하고 조선 땅에서 전쟁이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농민군들은 ‘척양척왜(斥攘斥倭)’를 외치며 전국 곳곳에서 봉기했다.

조일연합군과 동학농민군의 대규모 격전이 벌어진 공주 ‘우금치 고개’, 갖춘 무기도 변변치 않았던 농민군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결사항전 정신으로 전투에 임한다. 결국, 농민군들은 일본군의 근대 기관총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날 방송에서는 위기의 처한 나라를 위해 싸운 동학농민군의 한(恨)을 엿볼 수 있는 비화부터, 일본의 본격적인 야욕이 드러난 경복궁 습격사건, 청일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졌다.

/김주원 기자 sestar@sedaily.com

김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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