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최룡해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직지도부장을 비롯한 북한 정권 핵심 인사에 대한 인권제재를 전격 단행한 것은 북미 고위급회담에 나서지 않고 있는 북한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압박 차원으로 보인다. 조직지도부는 노동당·인민군 등 고위간부의 인사·검열을 맡는 북한 최고 권력기구로 최 부위원장에 대한 제재는 미국의 칼끝이 북한 최고지도부를 정조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미국은 인권유린을 이유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제재대상으로 지정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고위급회담에 응하지 않고 있는 만큼 미국은 북한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지렛대로 김정은 정권에 가장 부담이 되는 ‘인권’과 ‘제재’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으로 분석된다.
미 재무부는 10일(현지시간) 북한의 지속적이고 심각한 인권침해와 관련해 최 부위원장과 정경택 국가보위상, 박광호 노동당 부위원장 겸 선전선동부장을 대북제재 대상에 추가했다고 발표했다.
미 재무부가 북한 정권 핵심 인사들에 대한 독자제재를 단행한 것은 북미 고위급회담에 참여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북한의 태도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내년 1월 또는 2월로 2차 북미정상회담 시간표가 나오면서 미국은 회담 전 비핵화 방법 등 의제에 대한 조율을 위해 북한과의 고위급회담 성사에 공을 들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 사전 조율을 끝맺지 않은 상태에서 김 위원장과 핵 담판을 벌였다가 ‘빈손 회담’이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미 조야에서도 핵시설 사찰 검증 등 비핵화와 관련한 구체적 조치를 북으로부터 약속받지 않는 한 정상회담은 시간 낭비가 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 최고위층 지도부를 직접 겨냥한 독자제재를 단행하는 등 북한을 고위급회담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대북제재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세컨더리보이콧(제3자 기업·개인에 대한 제재)’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독자제재는 이란의 핵 포기 선언을 이끌어낼 정도로 강력한 제재로 북한에 가장 위협적이다. 실제 미국은 최근 러시아·중국 등 북한과의 관계가 긴밀한 주변국뿐만 아니라 전통적 우방인 일본의 대형 금융기업을 조사할 정도로 전방위 대북제재 압박에 나서고 있다. 이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도 미국 국무부와 상무부 관료들이 최근 홍콩을 방문해 대북제재 이행사항을 점검했다고 보도했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다만 이번 미국의 독자제재는 2차 정상회담을 앞둔 기 싸움 성격으로 북미대화 기류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서울경제신문 펠로(자문단)인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미국은 지난 1차 정상회담 때 실패한 경험이 있는 만큼 고위급회담을 통해 핵 신고·검증과 관련된 부분을 북한과 확실히 하고 싶어 하지만 북한은 정상 간 회담을 통해 비핵화 협상을 하려는 샅바 싸움이 팽팽하다”며 “이번 독자제재는 한미 간 대규모 군사훈련 유예 등 회유책과 함께 북한을 협상으로 끌어내기 위한 미국의 화전양면 전략”이라고 밝혔다. 한편 북한은 이번 제재에 즉각 반발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싱가포르 조미수뇌회담(북미정상회담) 정신에 배치되는 극악한 적대행위”라며 “앞에서는 두 나라 사이의 적대와 대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자고 확약하고 돌아서서는 대화 상대방의 존엄과 체제를 악랄하게 헐뜯으며 제재압박 책동에 광분하는 미국의 이중적 처사가 내외의 비난과 규탄을 자아내는 것”이라고 힐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