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제주도가 국내 첫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의 개원을 허용하자 시민단체들이 도청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시민단체들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도민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퇴진운동까지 선언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주된 이유는 원 지사가 숙의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원 지사는 2015년 보건복지부가 허용한 국내 첫 투자개방형 병원 건립을 올 6월 제주도 공론화위원회에 맡겼다. 공론화위 결론이 ‘개설 불허’로 나왔지만 원 지사는 심사숙고 끝에 공론조사 권고를 따르지 않고 병원 개설을 허가했다. 이를 두고 시민단체는 권력을 남용해 도민들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지난해 10월 교육부는 2022년도 대입제도개편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로 김영란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입제도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판단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10개월간 활동한 공론화위는 “시민참여단의 의제별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공론화위에서 제출한 1안과 2안이 오차범위 내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는 어정쩡한 답안을 내놓아 혼란만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공론조사에 예산을 20억원이나 들이고도 결론을 내지 못했으니 쓴소리를 들을 만했다. 공론조사의 장점도 퇴색시켰다.
국내에서 숙의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deliberative democracy)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정부가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중단 재개 여부를 공론화위에 맡기면서부터다. 김지형 전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은 공론화위에는 400여명의 시민들이 국민대표로 참여해 3개월간의 숙의 과정을 거쳐 최종판단을 도출했다. 이를 계기로 교육부 등 정부 부처는 물론 지방자치단체들도 공론조사를 정책 결정 수단으로 활용하는 분위기다. 부산시는 간선급행버스(BRT) 공사 재개, 광주시는 광주 지하철 2호선 건설 여부를 공론화위에 맡겼다. 인천시 같은 경우는 공론화위를 아예 상설기구로 제도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렇게 공론조사가 남발되면서 정책결정권자들이 공론화위를 책임회피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교육부의 대입제도개편안 공론조사가 대표적이다.
공론조사는 1988년 제임스 피시킨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처음 개발한 것으로 불특정 다수가 사안을 잘 모르는 채 응답하는 여론조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마련됐다. 주로 찬반이 팽팽한 갈등 사안에 대해 양측에 정보를 제공하고 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양측의 의견변화를 측정하는 조사기법이다. 숙의 과정에는 심층 토론, 전문가설명, 조별토론 등이 포함된다. 일반적인 여론조사는 일회성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공론조사는 다양한 정보와 토론, 전문가 설명을 접하는 숙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심층적이고 대표성을 띠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정책결정권자에게 공론조사 결과를 충실히 따르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공론조사 창시자인 피시킨 교수가 이끄는 스탠퍼드대 숙의민주주의센터(CDD)는 지난해까지 27개국에서 의뢰한 107개 프로젝트에 대한 공론조사를 진행했지만 모든 조사결과가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공론조사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수단이지 절대적인 결정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론조사는 참고사항으로 권고나 자문 정도로 활용해야지 아예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논란과 부작용을 더 키울 수 있다. 공론조사 창시자인 피시킨 교수도 ‘숙의민주주의는 대의제를 보완하는 수단’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제주도의 영리병원 허용을 숙의민주주의 파괴라는 주장은 공론조사를 ‘절대 선(善)’으로 보고하는 말이다. 그러나 숙의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대안 중 하나다. 결정을 뒤집을 거면 공론화를 무엇하려고 했느냐는 지적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민주주의 파괴라며 퇴진하라는 것은 한참 나갔다. 공론조사로 대표되는 숙의민주주의는 분명 좋은 도구이지만 최종 결정은 정책결정권자가 하고 결과를 책임지는 게 맞다. sh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