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전남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에 있는 빛그린국가산업단지. 광주시가 미래 친환경 자동차 산업생산 기지로 점찍은 곳이지만 땅을 파는 포크레인도, 건설자재를 운반할 트럭도 보이지 않았다. 406만6,000㎡에 달하는 드넓은 땅에는 근로자 한 명 없이 적막감만 흘렀다.
빛그린 산단이 4개월 넘게 개점휴업 상태다. 산단 용지를 관리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현장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산단 내에 현대자동차 위탁 공장이 들어설 부지가 19만평 정도인데 현대차와 광주시의 협상이 끝나지 않아 상하수도 공사, 도로 구획 등 기초 공사를 손도 못 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형 일자리 협상이 활발하던 지난해 9월에는 현대차 실무진이 방문해 부지를 둘러보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지금 당장 광주시와 현대차가 투자계약을 맺어도 착공은 일러야 올가을 정도다. LH 관계자는 “완성차 공장의 특성상 대지를 평평하게 다져야 하고 부지 변경과 각종 설계 인허가까지 받으려면 6~7개월은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투자 결정이 늦어지면서 협력업체들도 빛그린 산단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LH는 지난해 11월 소규모 공장 필지 25곳을 시범 분양했지만 신청은 4필지에 그쳤고 실제 계약은 그중 1필지뿐이었다.
광주형 일자리 사업은 노사민정 대타협을 통한 대규모 일자리 창출과 산업 활성화의 새로운 모델로 추진 중이다. 광주시와 현대차가 합작법인을 설립해 빛그린 산단에 연간 7만~10만대 규모의 1000cc 미만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공장을 세우는 프로젝트다. 자기자본 2,800억원, 차입금 4,200억원 등 총 7,000억원이 투입된다. 광주시는 현대차 생산직 평균 연봉의 절반 정도인 연 3,500만원, 주 44시간 근로 조건의 일자리를 조성해 해외로 빠져나가는 일자리를 지키고 기업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직접 고용 1,000여명, 간접 고용까지 합해 약 1만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정부는 특히 근로자의 임금을 낮춰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되 줄어든 임금을 국가가 주거·교육 등 복지로 보완하는 혁신 일자리 모델로 광주형 일자리에 주목한다. 이용섭 광주시장이 협상 전면에 나선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치권,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까지 적극 지원에 나선 이유다. 정부와 여당은 광주형 일자리가 성공하면 한국지엠 공장이 문 닫는 전북 군산과 경남 거제, 울산 같은 지역에도 제2의 광주형 일자리를 도입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협상 막바지에 와서 노동계가 몽니를 부리면서 광주형 일자리의 운명이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신설법인 상생협의회 결정사항의 유효기간은 누적 생산목표 대수 35만대 달성 시까지로 한다’는 현대차와 광주시의 지난해 12월 잠정합의안 문구에 노동계가 반발해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노동계는 5년간 임금·단체협상을 유예하고 근로조건을 동결하겠다는 뜻으로 여겨 반대했다. 현대차는 이 조항이 없으면 근로자들이 매년 임금 인상을 요구해 결국 하나마나 한 사업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이 같은 노사 불신에 민주노총과 산하 노조인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 등이 가세하며 광주형 일자리의 성사 여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민주노총과 현대차 노조는 “광주형 일자리가 지방자치단체 간 새로운 저임금 일자리 경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은 최근 자동차 산업 노사정 포럼 발족식에서 “광주형 일자리 논의를 즉각 중단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광주시 관계자는 “광주형 일자리는 저임금 근로자 양산이 아닌 기업과 지역 경제가 공동 번영할 수 있는 혁신안”이라며 “노동계가 하루라도 빨리 오해를 지우고 혁신적인 일자리 창출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이종혁·변재현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