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없었다면 ‘국회’라는 상징성이 있는 곳에 수소충전소를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죠.”
11일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한 후 처음으로 국회, 양재, 탄천 물재생센터 등에 수소충전소 설치를 허용하기로 하자 자동차 업계는 이같이 반겼다. 현재 국회는 상업지역이자 국유지다. 상업지역은 현행 국토계획법과 서울시 조례에 따라 수소충전소 설치가 불가능하며 국유지는 공익사업이 아니면 임대를 할 수 없다. 또 3,000㎡ 이상의 수소충전 시설은 도시계획 시설로 지정돼 있을 경우에만 설치가 가능한데 현대차가 신청한 5개 지역은 모두 지정돼 있지 않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 없이는 수소충전소 설치가 불가능한 셈이다.
정부가 이처럼 복잡한 규제를 풀어주는 데 30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점도 상당한 진전이다. 규제 샌드박스가 지난달 17일 시행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날 첫 번째 규제 특례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3일이다. 기존에는 기업들이 추진하는 새로운 사업이 합법적인지를 따지려고 해도 수개월 내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날 ‘앱 기반 전기차 충전 콘센트’ 규제 특례를 부여받은 차지인의 최영석 대표는 “우리 사업은 지난 2017년 대구광역시와 자동차부품연구원의 정부과제로 선정, 개발돼 안전 인증까지 완료됐지만 전기판매 규제로 1년 넘게 영업을 할 수가 없었다”면서 “규제 담당자가 누군지를 찾아내는 데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는데 한 달 만에 임시허가가 나온 것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차지인의 기술은 기존 전기차 충전소 외 아파트 지하 주차장 등에 있는 일반 콘센트로 전기차를 충전할 수 있는 기술이다.
마크로젠이 신청해 규제 특례 대상이 된 유전체 분석 건강증진 서비스는 개인정보보호 이슈가 민감한데도 정부가 과감하게 부담스러운 규제를 풀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종전에는 소비자가 의료기관이 아닌 민간업체에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는 항목이 혈당과 혈압 등 12개뿐이었지만 이번 조치로 고혈압·뇌졸중·대장암 등 13개 질환에 대한 유전자 검사 실증이 허용됐다.
제이지인더스트리가 신청한 디지털 버스광고도 다른 운전자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됐다. 버스 외부에 액정표시장치(LCD)와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을 부착해 광고판으로 활용하는 디지털 버스광고 시장이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규제 샌드박스는 2년(최대 4년)에 한해 규제 없이 실증사업을 허용하거나 임시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실질적인 규제 해소가 이뤄지지 않으면 또다시 규제에 막혀 사업화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수소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했지만 서울 도심 내에서 수소충전소의 부지만 확보하는 데도 전 부처가 나서서 규제를 예외로 해줘야 할 정도로 신사업을 하기 어려운 여건”이라며 “정부가 오는 2040년까지 목표로 한 수소충전소 1,200개소가 들어오려면 부지 사용 조건 자체를 완화하도록 규제 해소가 이뤄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현대차가 신청한 지역 중 종로구 현대 계동사옥은 인근에 문화재가 있어 ‘조건부’로 실증 특례가 부여되고 중랑 물재생센터는 수도권 주택공급계획에 따라 공공주택이 보급될 지역이라 대상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도 정부의 규제 혁신 의지가 더욱 강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에 대해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현 상태에서 안 되는 것들에 대해 규제특례를 적용한 것”이라며 “이번에 샌드박스를 적용한 규정이 6월 이후에 시행령에 반영된다면 더 원활하게 수소차 충전소가 도심 내나 인근에 설치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하루가 다르게 신산업이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규제 샌드박스 방식만으로는 규제 혁파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규제는 산적한 데 비해 규제 샌드박스로 소화할 수 있는 규제 혁파 건수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산업부는 이달 중 2차 산업융합 규제특례심의회를 열고 4건 안팎의 안건을 심의할 방침이다. 반면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등록규제는 1만4,177건에 달한다. 이 중 중소기업 관련 규제가 8,291건에 달하며 해당 규제는 벤처기업과 창업기업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내의 규제 관련 법령이 6,000개 이상이고 이런 법령을 근거로 만들어진 조례·규칙도 3만9,000여개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김주찬 한국규제학회 회장은 “정부의 시도가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날 분야 이외에도 더 다양한 분야로 확산돼야 한다”고 말했다.
카풀 등 이해관계자가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의 시도가 긍정적이지만 아직 규제 합리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면서 “카풀 문제 등 이해관계자 간 갈등이 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가 앞으로 규제 샌드박스가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짚었다. /강광우·박형윤기자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