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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가 간다] 말뚝·물 이용 암반서 바위 떼내...8톤짜리 상석, 통나무 깔아 옮겨

■고창 고인돌·마한 고분에 담긴 과학

암반 틈새 말뚝 박고 물 부으면

나무 부풀어 올라 바위 갈라져

덮개돌은 둔덕 만들어 굴려 올려

봉덕리 1호고분 금동신발 유물

3일간 경화처리제로 보존후 꺼내

향토사 전문가인 유기상 고창군수가 지난 6일 서울경제신문에 천제단으로 쓰이고 있는 도산리 탁자식 고인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향토사 전문가인 유기상 고창군수가 지난 6일 서울경제신문에 천제단으로 쓰이고 있는 도산리 탁자식 고인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



설날 다음날인 지난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전북 고창 고인돌 유적의 하나인 도산리 탁자식 고인돌.

고창 곳곳에 2,000여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으나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인 550여기의 고인돌 군집이 있는 고창읍 도산리·죽림리·상갑리 일대의 한 곳이다. 이 고인돌은 사람 키보다 더 큰데 두 받침돌이 100도 각도로 세워져 9월 말~11월 초 오전8시 전후 해 뜨는 방향을 가리키는 게 특징이다. 두툼한 판석 두 개를 받침돌로 삼아 8톤에 달하는 상석(덮개돌)을 올린 형태이며 판석과 상석 사이에 조그마한 돌과 흙을 넣었다. 주변 4기의 고인돌과 함께 주변이 정비되기 전에는 민가 장독대가 있었다. 역사·문화에 조예가 깊어 이날 기자와 동행한 유기상 고창군수는 “지금은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이 고인돌에서 천제를 거행하는데 예전에는 5월 단오와 10월 추수 이후 제를 모셨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이 흔히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제단과 별자리 관측을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대, 신앙의 대상물, 부족의 경계표시로도 쓰인 것이다. 고창 고인돌은 화순·강화와 함께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도산리에서 1㎞ 떨어진 ‘고인돌박물관’ 뒤쪽의 죽림리와 상갑리 일대는 풍수지리상 배산임수 지역으로 산기슭 아래 1.8㎞가량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만 무려 442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었다. 모양도 현지에 가장 많은 바둑판식을 비롯해 탁자식·개석식·지상석관식까지 다양하게 혼재돼 있다. 산 밑자락을 따라 고인돌 군집이 있고 그 아래 강이 흐르고 농사를 짓는 들판이 강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고창 고인돌이 밀집한 죽림리·상갑리·도산리 지형도. /사진=고창고인돌박물관고창 고인돌이 밀집한 죽림리·상갑리·도산리 지형도. /사진=고창고인돌박물관


수십 년 전까지는 이 강에 배가 드나들어 수천 년간 배를 이용해 해상물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박물관에서 4㎞ 조금 넘게 떨어진 고창 운곡람사르습지에서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둘레 16m, 높이 5m, 무게 300톤)도 볼 수 있었다. 유 군수는 “고창은 넓은 평야와 산·바다가 어우러져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 좋았다”며 “고인돌 군집에 천제단까지 있다는 것은 과거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옛날에 이런 거대한 고인돌을 어떻게 만들고 운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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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고인돌 유적 4코스에 있는 산속 채석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돌을 자르고 홈을 판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암반에서 바위를 떼어내기 위해 결을 따라 난 조그만 틈에 깊은 홈을 파서 말뚝을 박고 물을 부었다. 나무가 부풀어 오르면 바위가 쩍 갈라진다. 이후 큰 통나무를 많이 깔아놓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고 줄을 당겨 굴려 운반했다. 목적지에서는 받침돌을 세운 뒤 흙을 쌓아 둔덕을 만들어 상석을 굴려 올린 뒤 흙을 치우면 된다.

고인돌에는 주검 외에 석기류·토기류 등 부장품도 같이 묻었는데 방사성탄소연대나 토기열발광연대 측정을 하면 기원전 500~800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 시대 강력한 세력의 존재는 고인돌박물관에서 1㎞ 남짓 떨어진 아산면 봉덕리 고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봉덕리 4개 고분 중 1호분을 답사하다 보니 장축 72m, 단축 50m, 높이 7m 규모로 경주의 신라왕릉보다도 커 깜짝 놀랐다. 이 고분은 낮은 구릉을 직사각형 형태로 깎아 흙을 쌓고 석실이나 옹관묘를 만든 뒤 다시 그 위에 흙을 쌓는 구조다. 주변에는 도랑을 만들었다. 구릉처럼 생겨 사람들이 야산으로 오인해 1호분에 오래전 묘를 몇 기를 써놓은 모습도 남아 있었다. 심지어 봉덕리 3호분 위에서는 과거 경작을 하기도 했다.

유기상 고창군수가 지난 6일 고인돌박물관의 ‘모로비리국’ 전시장에서 마한시대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유기상 고창군수가 지난 6일 고인돌박물관의 ‘모로비리국’ 전시장에서 마한시대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


2009년 발굴된 봉덕리 1호분(5개 석실과 2개 옹관묘)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도굴됐으나 천만다행으로 4호석실(길이 280㎝, 폭 179㎝, 높이 180cm)이 보존돼 금동신발, 세형동검, 청동거울, 금귀고리, 은제장식 긴 칼, 은제 탁잔, 죽엽형 머리장신구, 칠기 화살통, 말 기구, 토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제 청자와 일본 고분시대 스에키 계통의 토기도 같이 있어 당시 중국·일본과도 활발히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금동신발은 원형이 완벽할 정도로 잘 보존돼 있는데 용·봉황·인면조신(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고 바닥에는 스파이크 모양의 징 18개가 부착돼 있다. 발굴 당시 문화재청과 원광대 발굴팀은 유물이 산화돼 바로 꺼내면 부스러지게 되므로 석실 안에서 3일간 경화처리제를 써서 견고히 보존처리한 뒤 꺼냈다. 최완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은 “봉덕리 1호분은 5세기 초엽 고분군으로 추정되나 백제식이 아니다”라며 “이곳은 삼한시대 마한 54국 중 하나인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중심지로 당시에도 마한의 정치세력이 유지됐음을 암시한다”고 밝혔다. 봉덕리 고분군 4기 중 1·2호분은 2015년 문화재청에 의해 전북에서 마한문화유적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유기상 고창군수가 지난 6일 봉덕리 고분1호의 답사에 앞서 마한시대 고분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유기상 고창군수가 지난 6일 봉덕리 고분1호의 답사에 앞서 마한시대 고분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


고인돌과 고분 외 방어시설인 예지리토성과 그 바로 옆에 태봉(胎峰)도 볼 수 있었다. 고인돌박물관도 들러 ‘모로비리국, 고인돌의 대지 위에 나라를 세우다’ 전시회를 안내한 유 군수는 “왕국은 왕성·왕릉 외 천제단과 왕의 자손의 태를 묻는 태실까지 네 조건을 갖췄다”며 “바로 이 일대가 기원전 3세기부터 존재했던 모로비리국의 활동무대였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있는 모로비리국은 고창의 옛 지명과 일치하는데 반경 20~30㎞ 안의 2,500~5,000가구(1만2,000~2만5,000명)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대형 옹관묘가 출토된 도산리 고분, 수천 점의 부장품이 쏟아진 만동 고분도 발굴됐다. 이병렬 지리학 박사는 “모로비리국 외에도 고창에는 농경이 발달한 흥덕·신림에 마한 주거지와 무덤·토성이 있는데 신소도국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창=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유기상 고창군수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둔 지난 6일 고창읍 새마을공원 내 ‘한국유림파리장서독립운동’ 기념비와 송천 고예진 선생 등 독립운동가 기념비 앞에서 ‘한반도 첫 수도 고창’이라는 달력을 들고 찬란했던 고창의 선사시대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유기상 고창군수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둔 지난 6일 고창읍 새마을공원 내 ‘한국유림파리장서독립운동’ 기념비와 송천 고예진 선생 등 독립운동가 기념비 앞에서 ‘한반도 첫 수도 고창’이라는 달력을 들고 찬란했던 고창의 선사시대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고광본선임기자


고광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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