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교황 비오 12세




1958년 10월 교황 비오 12세가 선종한 후 바티칸교황청은 그의 나치 협력 논란에 끊임없이 시달려왔다. 핍박받던 유대인을 막후에서 도와준 성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히틀러의 교황’이라는 비난이 제기됐다. 1963년 독일 극작가 롤프 호흐후트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책임을 묻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희곡을 발표하자 그의 홀로코스트 방조 의혹은 한층 거세졌다.

1876년 3월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비오 12세의 본명은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다. 로마 교황청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귀족 집안 출신인 그는 법률가가 꿈이었으나 18세 때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한다. 1899년 교회법과 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고 그해 4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집안과 오랫동안 친분이 있던 빈첸초 반누텔리 추기경의 도움으로 교황청 국무원에 들어간 것이 바티칸과의 첫 인연이다. 1917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로마 태생 정통파 신학자인 그를 바이에른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하고 대주교로 승품시켰다.


바티칸의 독일 외교사절 역할을 했던 그는 1939년 2월 교황 재위 후 2차대전 내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942년 성탄절에 “국적이나 인종 때문에 많은 이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될 때도 공개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모호한 태도가 사후 도마 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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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는 우리나라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47년 패트릭 번 주교를 특사로 파견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는 데 밑거름이 됐다. 교황청은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했고 번 주교를 최초의 주한 교황대사로 임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4일 비오 12세의 재임 시절 비밀문서를 내년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서 공개를 결정하면서 “교회는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했다. 교황 재위를 마친 70년 뒤 재임 당시 문서가 공개되지만 비오 12세의 나치 방조 협력 논란이 거세지자 공개일정을 8년 앞당겼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치욕스런 역사 숨기기에 급급한 일본이 뒤늦게나마 이를 교훈 삼아 깨우침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병문 논설위원

홍병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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