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8 독립선언, 3·1운동, 4·11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고 ‘말모이’ ‘항거’ 등 많은 작품들을 통해 독립운동가·민족운동가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다. 오늘은 이 글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과학기술로 민족을 진흥시키고자 했던 김용관 선생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한국에 처음으로 ‘과학의 날’을 만든 분으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8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간 그는 일본의 근대화가 과학기술에 힘입은 것을 깨닫고 고국으로 돌아와 민족 공업기술의 진흥과 발명가 양성을 위해 1924년 ‘발명학회’를 창립한다. 하지만 발명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았던 탓에 학회는 한동안 정회상태로 놓여 있게 된다. 발명학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그는 사회 명사들을 간부로 영입했고 발명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서서히 형성되면서 발명학회는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본격적인 발명 진흥을 위해 물리학·화학 등을 연구하는 이화학연구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입한 사회 명사들과 의견 차이가 있었고 전문연구기관 설립은 쉽게 이뤄지지 못한다. 그와 기존 학회 간부들은 발명 진흥을 위해 전문적 기술 역량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영입된 사회 명사들은 굳이 전문연구기관까지는 필요하지 않으며 그보다 과학 대중화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발명학회는 발명 진흥 사업과 과학 대중화 운동의 두 축으로 활동하게 된다.
내부적인 상황과는 달리 부흥기를 맞이한 발명학회는 1933년 찰스 다윈 서거 50주기를 맞아 그가 숨진 4월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과학 대중화 행사를 개최한다. 과학활동사진 상영회는 8,000여명이 운집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과학데이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과학지식보급좌담회에서는 이화학연구기관 설치에 대한 안건도 논의됐지만 별다른 결론을 얻지는 못한다. 과학데이 행사의 성공에 힘입어 발명학회는 과학 대중화에 집중하게 되고 ‘과학지식보급회’도 창립하게 된다. 이는 사회 명사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며 이화학연구기관 설립을 민족적 차원에서 실현하기 위한 그의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 명사들을 설득하는 것은 순탄치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인사들은 전문연구기관 설립보다 과학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한 논의가 이어지던 중 발명학회는 친일 인사들로 재편돼갔다. 과학 대중화 활동도 위기를 맞게 된다. 발명학회의 활동을 용인하던 총독부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고 과학데이 행사마저 제지를 당한다. 이와 함께 제국발명협회 조선지부가 설립되고 운신의 폭이 좁아진 발명학회와 과학지식보급회는 친일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결국 발명학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황해도에서 교사로 지내며 일생을 보내게 된다. 이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66년이 돼서야 한국과 미국 정부가 같이 돈을 내고 고(故) 최형섭 박사 등이 나서 과학기술 전문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설립된다. ‘과학의 날’도 1967년 과학기술처 발족일을 기념해 4월21일로 제정된다. 그가 과학대중화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과학대중화운동가를 넘어 과학 진흥을 위해 앞장섰다.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과학의 중요성을 대중이 조금 더 일찍 인식할 수 있었고 이는 지금의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됐다.
과학기술도 역사가 축적된 결과이다. 그의 뜻대로 전문연구기관이 설립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역사에서 얻은 교훈으로 현재를 개선해나가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이다. 100년이 지난 후 우리의 오늘과 과학기술은 역사에 어떻게 기억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