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도 그렇고 다들 힘든 시기를 겪고 이겨내면서 더 좋은 선수가 됐잖아요. 저는 그동안은 이렇다 할 슬럼프가 없었는데 다르게 생각하면 지난 10개월간 감사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두 달 넘게 훈련 중인 최나연(32·SK텔레콤)은 생각보다 목소리가 밝았다. 그는 지난해 4월 허리 디스크 악화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생활을 중단하고 재활치료를 받으며 휴식해왔다. 통산 LPGA 투어 9승,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8승의 슬럼프도 모르던 대선수에게 경쟁이 사라진 삶은 절망적일 것 같았다. 하지만 최나연은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쉬는 동안 좋은 경험들을 통해 골프를 대하는 자세가 바뀌었다. 처음으로 스트레스 없는 골프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며 웃음을 곁들였다.
투어에 병가를 내고 10개월 이상을 쉰 그는 오는 21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열리는 파운더스컵을 통해 필드로 돌아온다. 11개월 만의 복귀전이다. 지난해 12월에 대회 참가 신청을 했다는 최나연은 “올 시즌 최소 12개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올 초 메인 후원사인 SK텔레콤과 재계약에도 사인했다.
2010년 LPGA 투어 상금왕과 평균타수 1위를 동시에 수상했던 최나연은 지금까지 LPGA 투어에서만 총 1,072만달러(약 120억4,000만원)를 벌었다. 통산 상금 역대 12위. ‘1,000만달러 클럽’에 한국 선수는 박인비, 박세리, 최나연, 유소연 4명뿐이다. 그랬던 최나연은 2015년 6월 마지막 우승 뒤 깊은 수렁에 빠졌다. 2016시즌 중반부터 컷 탈락과 기권을 반복하는 난조를 겪었다. 2017년에는 톱10 진입이 한 차례뿐이었고 지난해 시즌 초반 결국 두 손을 들었다. 2년 전쯤 찾아온 드라이버 입스(샷 하기 전 실패에 대한 불안 증세)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허리 통증은 심해지는 등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2위까지 치솟았던 세계랭킹이 지금은 455위까지 떨어져 있다. 최나연은 “조금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다시 아파지는 상황이 3년간 계속됐다. 무리해서 대회에 나가고 드라이버를 치면서 스윙은 스윙대로, 몸은 몸대로 망가진 느낌이었다”고 돌아봤다.
공백이 길어지면서 은퇴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지만 최나연은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여자골프도 시니어 투어가 생겼다. 롱런하고 싶어서 허리에 무리가 덜 가는 스윙을 익히고 있다”며 “몸 관리만 잘하면 이만큼 좋은 직업도 드물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사랑하던 골프한테 지난 2~3년간은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신감을 느끼는 기분이랄까. 근데 지금은 다시 골프가 하고 싶어졌어요. 대신 예전처럼 스트레스 받으면서 자신을 가둬둔 상태로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골프 클럽을 아예 멀리한 첫 넉 달이 최나연의 마음가짐을 바꿔놓았다. 병가를 낸 직후에는 15박17일로 혼자 유럽여행도 다녀왔다. 마음 편히 늦잠을 자기도 하고 반대 방향의 열차를 잘못 타 3시간을 돌아가기도 하고 다양한 여행자들을 만나 그동안 꺼내놓지 못했던 고민도 털어놓았다. 골프채 없는 여행은 거의 처음이었다. 최나연은 “좋은 타이밍에 정말 물 흘러가듯 여행했다. 그곳에서는 실수도 재밋거리가 됐다. 무엇보다 그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자체에 대해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여행 뒤에도 스스로 골프가 하고 싶어지고 골프가 그리워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줬다”고 했다. 골프채를 다시 든 것은 지난해 8월. TV 중계에 나온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의욕을 얻고 연습을 시작했다. 대신 예전과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는 또래들이 즐겨 한다는 컴퓨터 게임에도 빠져보고 친구들과의 연습 라운드 중에는 주말골퍼들처럼 약간의 음주도 곁들여봤다. 최나연은 “평생 골프를 심각하게 일로만 쳐온 터라 아마추어분들이 느끼는 재미 중 하나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며 웃었다.
최나연은 “골프는 저한테 늘 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였다. 고등학생 때 프로가 됐고 그때부터 밥 먹는 습관이나 운동, 심지어 책 읽는 것까지 오로지 골프를 잘하기 위한 쪽으로 맞추면서 마치 로봇처럼 완벽주의에 빠졌던 것 같다”면서 “잠깐 쉬는 시간에도 ‘이렇게 쉬어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런 압박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허리 통증도 거의 가셨다. 드라이버 입스 또한 박인비·이보미 등 동료들의 조언과 스윙 교정을 통해 거의 떨쳐냈다. 연습 라운드는 긴장감을 통한 실전 감각 회복 차원에서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 최나연은 “(복귀전을 생각하면) 루키 때보다 더 떨린다”면서도 “잃었던 자신감을 조금씩 쌓아올린다는 생각으로만 임하겠다. 올해가 안 되면 내년이 또 있으니 최대한 자유를 느끼면서 골프를 하고 싶다”고 했다. 스물여덟 때가 마지막이었던 우승이 다시 찾아오면 최나연은 어떻게 맞이할까. 그는 “목놓아 울 것 같다. 정말 펑펑 울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