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정책

[시그널 Deal Maker] 기술과 법률의 동거시대

■정경호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사인(私人)들끼리 무언가 사고팔고 하는 사적 거래를 규율하는 법을 사법(私法)이라고 하는데, 사법을 지탱하는 큰 기둥 세 개를 꼽자면 ‘계약’과 ‘등기’와 ‘증권’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추세를 보면 이제는 ‘계약’과 ‘기술’로 고쳐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등기부등본을 인터넷으로 열람하고 발급할 수 있게 된지는 이미 오래고 재작년부터는 부동산거래 전자계약 시스템까지 도입되었다. 몇 년 전 전자단기사채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일부 사채를 전자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더니만, 이제는 조만간 ‘주식·사채 등의 전자등록에 관한 법률’(이하 ‘전자등록법’)을 시행하면서 전자주주명부 제도를 도입한다고 한다.

전자주주명부는 증권 실물을 없애고 전자 기록을 통해서만 증권을 거래하도록 하는 제도다. 찬찬히 법을 읽어보니 상장회사에 대해서는 적용을 강제하는 등 범위가 넓고 예상되는 변화의 폭도 크다. 전 세계가 5세대이동통신(5G)를 준비하는 마당에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도 들지만, 개별 거래에서 계약서를 검토하고 그 거래의 실행가능 여부를 살펴야 하는 변호사 입장에서는 우려하는 바가 없지 않다.


우선 전자거래방식에서 불가피한 정형화, 규격화 강제가 조금 걱정된다. 전자적인 방식으로 거래하는 이상 그 효율성을 위해 정형화, 규격화한 거래만 강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때로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조건을 말로 풀어 써야 하는 경우가 있다. 아날로그 거래에서는 가능하지만 전자거래에서는 시스템이 허용한 서식에만 조건입력이 가능할 것이므로 전자거래시스템은 규격화하지 않은 거래를 수행하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일례로 나름의 사정이 있어 사채의 만기일을 글로 풀어 써야 했던 사안(예컨대 특정 부동산의 소유권등기가 이전된 날로부터 5년)에서 전자공시서식이 이를 지원하지 않는 까닭에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다. 법으로는 만기일을 위와 같이 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나 거래시스템상 입력이 허락되지 않아 그와 같은 조건으로 사채를 발행할 수 없다고 하니 중요도 기준으로 나열하자면 ‘계약과 기술’이 아니라 ‘기술과 계약’이라 칭해야 할 것 같다.

시스템의 빈틈이나 오류로 인한 피해도 걱정이다. 물론 당국에서도 철저한 대비를 하겠지만 인간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니 예기치 못한 사고가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과거 아날로그 시절에는 착오가 발생하더라도 피해가 해당 부분에만 한정되었지만, 초연결시대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다른 부분으로 퍼져나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얼마 전 모 증권사의 시스템에 빈틈이 있어 존재하지도 않는 주식이 직원들의 주식계좌로 이체되었고 일부는 잠깐 사이에 시장에 유통되기까지 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전자방식이란 것은 실체가 없고 전기 신호를 이용해 표현된 정보에 불과한 것 아닌가. 언제 휙 하고 날아가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법률 정비작업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전자등록법에는 질권자만 언급하고 있을 뿐 아직 실무상 종종 이용하는 양도담보권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언급이 없다. 또한 증권 실물이 발행되지 않는 만큼 전자증권강제 집행과 관련해 기존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입법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아직 스마트폰조차 사용하지 않는 필자에게 가상화폐에 관심이 많은 후배가 얼마전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술 발전과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고. 기술적인 거래시스템이 오히려 법률을 압도하는 작금의 현실을 보니 이제는 인수합병(M&A)거래를 자문하기 위해서는 법 뿐만 아니라 기술까지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임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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