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27일 전국경제인연합회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소식에 재계는 아쉬움을 넘어 허탈함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주력 산업의 위기 등으로 경제상황이 어렵고 악화일로로 치닫는 한일관계 등의 돌파구로서 전경련 카드가 유효하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일각에서는 아직도 재계를 적폐집단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재계의 한 임원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며 “허창수 전경련 회장에 대한 청와대 만찬 초대를 계기로 전경련과의 경색된 관계에 물꼬가 트이길 기대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미 예상했다”는 자조 섞인 반응도 적지 않았다. 그간 산발적으로 대기업과의 관계 모색을 꾀하는 듯한 포즈를 취해왔던 정부가 기대와 달리 항상 원위치로 돌아갔다는 이유에서다. 한 대기업 실무자는 “이번 일도 한·벨기에 비즈니스 포럼의 주최자로서 벨기에 쪽에서 전경련에 대한 예우를 청와대에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예상이 많았다”며 “재정과 벤처·중기 중심의 정책 방향이나 사정 당국이 대기업을 다루는 방식, 국민연금이 대기업 주총에 관여하는 방식 등을 보면 여전히 대기업은 적폐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푸념했다.
정부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도 나왔다. 4대 기업의 한 임원은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우리 경제가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경제에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하는 정부가 대기업에 도움을 구할 리 만무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다른 관계자도 “현실 경제 판단을 놓고 정부와 국민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다”며 “일자리도 다 대기업에서 나오는데 문제 해결의 창구를 스스로 닫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우려했다.
보호무역주의·과거사 등에 얽힌 국가 간 갈등을 해결할 창구로서 전경련의 역할을 살려야 한다는 고언이 적지 않았다. 실제 전경련은 지난해 2월 미국에 민간 대표단을 파견해 통상마찰 문제를 논의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장 한국산 자동차의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을 막는 데도 전경련은 힘을 보탰다. 이런 활동은 전경련이 아니면 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전경련 국제네트워크는 경험과 노하우, 규모 등에서 다른 경제단체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한미재계회의 등 31개국 32개 경제협력위원회를 통해 해외 주요국과 교류하고 있다. 최근에도 허 회장은 신동빈 롯데 회장, 김윤 삼양 회장, 조현준 효성 회장 등과 함께 경제사절단을 꾸려 일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 비즈니스(B20) 서밋에 참가했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전경련이 과거 정권의 관행으로 정경유착의 고리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직원 절반이 퇴사하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며 “통상환경이 엄중한 만큼 글로벌 네트워크가 풍부한 전경련이 국가에 기여하게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자세 전환을 촉구하는 강경한 목소리도 들렸다.
한 중견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정부가 여전히 진영 논리에 기대 전경련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다”며 “재정을 통한 공공 일자리 창출도, 벤처를 통한 혁신도 대기업을 배제하고는 반쪽짜리”라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모두의 지혜와 역량을 모아도 모자랄 판인데 제정신인지 모르겠다”며 “경제가 더 악화되고 난 뒤에 변화해서는 늦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