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면서 원유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 속에 국제유가가 연일 급등하고 있다. 아직 지난해 말 급락분을 만회한 수준이지만 국제유가가 배럴당 80~9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유가 급등이 국내적으로는 다음달 유류세 한시 인하 조치 종료 시점과 맞물리면서 체감물가를 끌어올리고, 이는 소비를 더욱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겹악재에 국제유가↑ “배럴당 80~90달러” 전망도=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8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전 거래일보다 2.09%(1.32달러) 오른 64.4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지난해 10월31일 이후 5개월여 만에 최고치다. WTI 가격은 올해 들어서만 38% 이상 치솟은 상태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6월물 브렌트유도 이날 1.08%(0.76달러) 오른 71.10달러에 장을 마감하며 지난해 11월7일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브렌트유는 3거래일째 오름세를 이어가며 연초 대비 상승률이 30%를 넘어선 상태다. 두바이유도 이날 약 5개월 만에 종가가 배럴당 70달러를 돌파했다.
국제유가는 올해 들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에 더해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 주요 산유국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이어지면서 상승 흐름을 보여왔으나 최근 리비아가 사실상 내전에 돌입하고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세 수위가 높아지면서 상승세에 속도가 붙었다.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이란 혁명수비대(IRGC)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해 이란의 원유 수출이 한층 막힐 수 있다는 우려를 부추기며 유가를 끌어올렸다. 시카고 투자자문업체 프라이스퓨처스의 필 플린 수석 연구원은 “이번 지정이 명백히 (유가를) 새로운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산 원유 구매자들에게 면제 혜택을 주지 않을 확률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리비아 동부 군벌 실세인 칼리파 하프타르 최고사령관이 이끄는 리비아국민군(LNA)과 통합정부군(GNA) 간 내전도 원유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이날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유일하게 운영되는 미티가 국제공항이 LNA의 전투기 공격을 받아 기능을 중단하는 등 리비아 사태는 시시각각 악화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대통령과 임시 대통령 간 다툼이 이어지는 베네수엘라와 이란 제재로 이미 세계 원유 공급에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추가로 원유 수출 충격이 오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처럼 유가 상승 요인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자 시장에서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에서 높게는 90달러 수준까지도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다만 올해부터 OPEC과 함께 하루 120만배럴의 감산에 나선 러시아의 이탈 징후가 포착된데다 셰일 붐이 한창인 미국이 지난달 말 세계 최고 수준인 1,220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는 등 유가 급등을 저지하는 요인들도 있어 상승 폭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골드만삭스의 제프 커리 이사는 “유가가 완만하게 오르겠지만 세계 석유 시장에 여전히 하루 100만배럴 공급이 부족하다”며 “배럴당 70~75달러가 상승의 한계”라고 내다봤다.
◇국제유가 상승→휘발유 값 상승→물가 부담=국제유가 상승은 지난해 11월부터 시행한 유류세 15% 한시 인하 조치 종료와 맞물려 가계 물가를 단시일 내에 급등시킬 우려가 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6일부터 유류세 인하 조치를 취했는데 오는 5월6일 종료된다. 당시 정부는 유류세 인하 조치로 휘발유는 ℓ당 123원, 경유 87원, LPG 30원씩의 가격 인하 효과가 있을 것으로 봤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4월 첫째 주 평균 휘발유 가격은 ℓ당 1,397원99전이다. 유류세 인하 조치가 종료되면 해당 금액만큼 가격이 올라가는 셈이다. 여기에 국제유가 상승분이 더해지면서 소비자들이 실제 느끼는 기름값 상승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정부가 유류세 인하 조치를 발표했을 때 국제유가는 WTI 기준 배럴당 62~63달러 수준이었다. 정부는 “아직 유류세 인하 연장 여부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다”라며 신중한 입장이다.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휘발유 가격 인상은 3개월째 0%대 상승률을 기록하며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낳고 있는 소비자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지난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4%에 그쳤다. 1월(0.8%), 2월(0.5%)에 이어 3개월째 0%대 상승률이다. 한국은행 목표치인 2% 상승률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경기 회복으로 소비가 늘어 물가가 오르는 수요 측 요인이 아닌 국제유가 상승, 즉 공급 측 요인에 따른 물가 상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더욱이 0%대 저물가 흐름과 달리 소비자들의 물가인식(1년간 소비자들이 인식한 물가상승률)은 2.4% 수준이다. 신유란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국제유가 상승 같은 공급 요인에 의해 소비자물가가 오르는 것은 긍정적인 시그널이 아니다”라면서 “경기 상황은 그대로인데 물가만 올라가는 것이라면 소비자가 물가 부담만 떠안고, 이는 소비를 더욱 움츠러들게 해 경기를 위축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한재영기자 김창영기자 jyha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