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바이스’에는 50분 가량의 러닝타임이 지난 후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체니 가족은 정계를 떠나 다시는 대중 앞에 서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행복을 누리며 버지니아에 살았다.”
내레이션이 끝나면 느닷없이 스크린 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이렇게 짧은 영화였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객석에서 엉덩이를 떼려는 찰나, 영화는 올라가던 엔딩 크레디트를 잘라먹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대선을 준비하는 조지 W 부시(샘 록웰) 캠프에서 걸려온 이 전화를 받은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의 인생은 다시 한 번 크게 방향을 꺾는다. 체니는 “러닝메이트로 함께 뛰어달라”는 캠프의 영입 제안을 수용하면서 대선 이후 미국 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술에 찌들어 결석을 밥 먹듯 하다가 예일대에서 퇴학당한 뒤 국회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백악관 수석, 국방부 장관, 군사기업 핼리버튼의 최고경영자를 거친 체니가 마침내 세계 최강대국의 2인자로 올라서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역대 어느 부통령(vice)보다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던 체니의 선택과 결정이 어떻게 세상을 악(vice)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는지 추적한다. 대량살상무기의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으로 일으킨 이라크 전쟁, 세계 시민의 평화를 크게 해친 국제 테러의 기원에는 모두 체니가 있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위협으로 간주되는 여객기는 무조건 격추하라”고 군에 명령한 것도 부시 대통령이 아닌 체니였다.
11일 개봉한 ‘바이스’는 실화에 기초해 굵은 필치로 권력의 작동 방식을 그리면서도 달콤한 출세와 쓰디쓴 몰락을 함께 경험한 인간의 마음자리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미국발(發) 금융위기의 기원을 파헤친 ‘빅 쇼트(2016년)’로 유명한 애덤 맥케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저널리스트의 날카로운 눈과 예술가의 매운 손맛을 겸비한 연출자라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나날이 발전하는 특수분장 기술의 도움을 얻어 실존 인물의 외양을 완벽하게 구현한 크리스찬 베일과 샘 록웰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이스’를 다 보고 나면 영화 중반 모든 이야기가 끝난 듯 엔딩 크레디트를 올리는 척했던 감독의 선택을 과시적이고 장난스러운 스타일로만 치부하기는 힘들어진다. 이 낯설고 독특한 형식의 편집은 체니가 그냥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다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면 그의 인생과 세계의 역사가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으리라는 것을 뼈아프게 꼬집는다. 사진제공=콘텐츠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