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재정 분야의 전직 관료들이 ‘2020년 정부 예산편성 지침 수립에 즈음하여’라는 논평을 냈다. 전직 재정관료와 재정학자로 구성된 건전재정포럼은 “내년 예산편성은 향후 국가 재정운영 방향을 가늠할 시금석”이라며 “연이어 진행될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그동안 소중히 가꾼 재정규율이 쉽게 허물어질까 봐 심히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국민은 세금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기를 바란다”며 “국민적 숙려 과정과 재원의 면밀한 추계가 부족한 공약이나 목표의 명확성과 상호 유기성이 취약한 공약은 재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건전재정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최종찬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 원장은 최근 서울 등촌동의 집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재정 문제는 잡초처럼 낭비요소를 계속 뽑아내야 건전성을 지킬 수 있다”며 “재정의 구조개혁이야말로 한시도 게을리할 수 없는 지상과제”라고 역설했다.
-정부가 내년 예산 규모를 늘리면서 과도한 재정확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한국의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38% 수준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따지면 아직 재정 건전성이 양호한 편이다. 정부가 경기를 살리겠다며 또다시 추경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것인지 여부다. 지금 괜찮다고 마구 사업을 벌인다면 누가 뒷감당을 하겠는가. 그나마 건물이라도 짓는다면 봐줄 수 있다. 복지 지출이나 공무원 증원은 돈이 계속 투입돼야 한다. 한번 시작하면 후퇴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복지 분야에 재정 씨앗을 너무 많이 뿌리고 있다. 당장 큰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건강보험 보장 범위를 넓히고 무상복지도 앞다퉈 도입했다. 저출산·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성장률이 둔화되는 현재의 경제구조로는 20~30년 후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부터 바짝 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이를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경기가 워낙 안 좋은 상황에서 재정의 역할이 필요한 것 아닌가.
△건전재정이라고 해서 무조건 돈을 쓰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필요하다면 경기조절에 나서야 하는데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신중하게 집행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장 여력과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등 효율적인 분야에 투입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인기영합적 지출이 지나치게 많다. 한 달, 두 달짜리 일자리를 만들고 전깃불이나 끄는 데 쓰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런 식으로는 절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청년실업 문제도 그렇다. 청년 일자리를 만들자면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 투자를 늘려야 하는데 엉뚱하게 쓰이고 있다. 구직활동에 재정을 지원하는 구조는 잘못된 것이다. 재정 문제는 미래 세대를 위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현재 20~30대의 30년 후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쓸 수 없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재정을 과감하게 쓰라며 추경의 필요성까지 언급했는데.
△현직에서 IMF와 협의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국제기구의 거시경제정책 제안은 나름 이해할 만하다. 당장 일자리가 부족한 터에 재정으로 성장률을 높이라는 얘기는 당연하다. 하지만 IMF는 몇십 년 후의 한국 경제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데 제한적으로 써야 한다. 공무원을 17만명 늘리거나 청년수당을 나눠주고 충분한 타당성 검토 없이 지방공항을 짓는 결정은 문제가 많다. 추경도 그야말로 경기부양만을 목표로 미뤄왔던 사업에 집중돼야 한다. 단지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이상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그런 정책은 미봉책에 머무를 뿐이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란도 크다.
△재정 문제는 장기적으로 숱한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국민연금만 해도 정부가 4지선다형 개편안에 머무를 게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빨리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연금이 오는 2061년께 고갈된다고 하지만 그 시기는 갈수록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현재 구조로는 개인 부담이 9%에서 26%로 높아져야 존속이 가능하다고 본다. 당장은 괜찮지만 미래를 생각해보면 갑갑하다.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26%로 올린다면 누가 받아들이겠나. 그전에 개선책이 나와야 되는데 묘안이 있을 수 없다. 지금 더 많이 내든가 나중에 적게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통스럽지만 정부가 용기 있게 국민과 대화해야 한다. 선거 악재라며 차일피일 미루고 미봉책으로 덮는다면 문제를 풀기 더 어려워진다. 지금 못 올리면 몇 년 후에는 더 많이 인상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연금처럼 재정에서 지원한다면 그만큼 다른 데 투입할 몫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러다가는 한국이 그리스나 베네수엘라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아무도 얘기를 안 한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건강보험만 해도 알뜰히 관리해온 덕분에 적립금이 20조원에 달했지만 지난해부터 적자로 돌아섰다. 임플란트 보장도 좋지만 지속 가능하냐는 문제부터 절박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부는 그래도 일자리 차원에서 공무원 증원이 필요하다는데.
△여러 가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지금 공무원이 꼭 필요한 서비스를 위해 늘린다면 문제가 없다. 물론 소방공무원처럼 필요한 분야도 있지만 그 숫자가 심층적인 분석을 거쳐 나온 게 아니다. 선거 때 외국보다 우리 공무원 비중이 낮다는 판단에서 나왔는데 이미 역할을 다했거나 필요성이 줄어든 분야에 대해서는 구조조정 같은 노력도 병행하면서 최소한의 범위에 머물러야 한다. 민간이 일자리를 못 만드니 공무원으로 메우겠다는 발상은 굉장히 위험하다. 세금으로 일자리를 늘린다면 세계 어느 정부가 못하겠는가. 지금 지방에는 인구가 줄어들어 학생보다 교직원이 더 많은 곳도 적지 않다. 학교를 과감히 통폐합하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가고 있다. 이런데도 지방교육재정교부율은 내국세의 20% 수준에서 고정해놓고 있으니 무상교육 재원을 놓고 부처끼리 치고받는 것이다. 공무원을 늘리더라도 이런 근본적인 개혁을 끊임없이 병행해야 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릴까 우려스럽다.
△우리는 전국 단위의 선거가 세 개나 있어 경제운용, 특히 재정관리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과거 행정부 권한이 강할 때는 그나마 재정 건전성이 유지됐다고 본다. 예산실에 힘이 실리면 포퓰리즘 압력을 적게 받아 합리성과 효율성을 충분히 따져볼 수 있다. 지금은 국회의 파워가 커지다 보니 재정규율이 예전보다 많이 흐트러졌다. 학계에서는 행정부가 센 나라일수록 재정 건전성이 강하고 행정부가 약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도 하더라. 정치인은 속성상 표를 얻으려는 유혹에 빠지는 만큼 시스템으로 재정 낭비를 막아야 한다. 많은 나라가 재정준칙 같은 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예컨대 국가부채는 GDP의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고 적자 규모도 범위를 설정해놓는다. 스스로 족쇄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국가재정법을 보완하는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아는데 서둘러야 한다.
-요즘 후배 공무원들을 보면 어떤가.
△공무원들이 무력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청와대가 국가적 어젠다를 주도하고 결정해버리니 부처에서는 지시를 이행하는 구조 때문이다. 사실 청와대 수석뿐 아니라 장관들도 모두 대통령 참모다. 풍부한 정보와 인력을 갖춘 부처를 제쳐놓고 비서관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그런 점에서 장관들이 예전에 비해 훨씬 왜소해졌다고 본다. 청와대가 장관들에게 인사나 업무에 대한 권한을 과감히 부여하고 잘못되면 장관을 문책해야 한다. 청와대에서 모두 결정하고 나중에 문제가 터져 장관들에게 떠넘긴다면 영이 제대로 설 수 없다. 세종시 문제도 심각하다. 부처 장차관은 물론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세종시보다 서울에 많이 머무르다 보니 행정낭비나 의사결정의 질적 하락 등 보이지 않는 비용 부담이 크다. 모두가 현안에 파묻히는 바람에 정책 시야가 너무 단기화되는 문제도 바로잡아야 한다.
-청와대가 포용국가를 목표로 중장기 국가전략을 만든다고 하는데.
△정부가 국민들에게 국가 비전을 통해 큰 방향을 제시하고 국력을 결집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국민적인 공감대부터 먼저 형성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현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공감대는 별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예전처럼 정부가 국민들을 설득해 힘을 모으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함께 뛰는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진영논리나 이념 문제로 인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 국론이 분열되는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미래를 길게 내다보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아쉽다.
-참여정부 때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냈는데 요즘 부동산 문제는 어떻게 보나.
△거래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집값은 많이 안정됐다. 시장 기능보다 규제 위주로 나가는 정책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강남 재건축 규제만 해도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 길게 보면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새 아파트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느냐는 문제도 고민해봐야 한다. 일부 이익을 세금으로 환수하는 것은 몰라도 재건축 자체를 어렵게 하면서 규제 위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다. 시민단체 등에서 주장하는 후분양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문제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깊이 따져보지 않으니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게 마련이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대규모 분양에 성공해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는데 누가 감당하겠나. 그것도 적정 이익만 붙여 싸게 팔라는 논리는 현실성이 없다. 건설사가 부담을 떠안으면서 책임지라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결국 공급물량이 줄어들어 소비자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ssang@sedaily.com
He is
1950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서울대 무역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년 행정고시 10회에 최연소로 합격해 공직에 들어온 뒤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총괄과장, 경제기획국장,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장 등을 거쳐 조달청 차장, 기획예산처 차관,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참여정부 시절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건전재정포럼 공동대표와 선진사회만들기연대 공동대표 등을 맡아 사회개혁활동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 저서로는 ‘최종찬의 신국가개조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