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구찬 선임기자의 관점]정권마다 춤추는 자사고 정책..."정치·이념 덧씌우면 교육 망친다"

■ 위기의 자사고 현장을 가다

당국 24개 자사고 재지정 평가 돌입

합격 커트라인 일제 상향에 '패닉'

"공약 꿰맞춘 폐지 요식행위" 반발

공정성 결여 논란에 행정소송 예고

정작 학생·학부모 의견도 반영안돼

일괄 폐지 대신 자율전환 유도

일반고 역량 키우기 우선 돼야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재평가가 최근 시작됐다. 교육 당국은 합격점에 미달하면 일반고로 강제 전환하기로 해 전국 42개 자사고에서 퇴출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1기 자사고로 출범한 전주 상산고 정문에 내걸린 현수막에서 이런 위기감을 느껴진다. /전주=권욱기자자율형 사립고(자사고) 재평가가 최근 시작됐다. 교육 당국은 합격점에 미달하면 일반고로 강제 전환하기로 해 전국 42개 자사고에서 퇴출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1기 자사고로 출범한 전주 상산고 정문에 내걸린 현수막에서 이런 위기감을 느껴진다. /전주=권욱기자






지난 18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구 상산고등학교. 고교 수학 참고서의 끝판왕인 ‘수학의 정석’ 저자 홍성대 도서출판 성지사 회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바로 그 학교다. 상산고에 1981년 개교 이래 전례 없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재지정 여부를 가리는 학교평가에 돌입해서다. 학교 정문에는 ‘전북의 자존심, 상산고를 지켜 주세요’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학부모회 명의로 내걸려 있었다. 학교 입구부터 고입정책의 변화로 자사고가 겪는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문 바로 옆 동문회관 담벼락에도 교육 당국의 공정한 학교평가를 촉구하는 대형 플래카드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달 말부터 시작된 재평가 시즌을 맞아 전국의 자사고가 좌불안석이다. 재평가에서 탈락하면 영락없이 일반고로 강제 전환될 처지이기 때문이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5년마다 자사고를 재평가하고 기준 점수에 미달하면 일반고로 전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올해 재평가 대상은 전국 42개 자사고 가운데 24곳. 이중 서울에만 13개가 몰려 있다.


자사고 재평가는 2014~2015년 시즌에 이어 두 번째이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줄을 쥔 시도 교육감의 상당수가 자사고 폐지를 내걸고 지난해 당선됐다. 교육부와 교육청이 한 방향으로 갈 여건이 마련됐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1기 재평가 때와 180도로 다르다. 서울 교육청이 2014년 재지정 기준을 70점으로 책정해 자사고 6개를 탈락시켰음에도 교육부가 직권으로 구제했다. 교육부는 이듬해 합격 커트라인을 일괄적으로 60점을 제시했다. 재정난 등으로 자사고 타이틀을 스스로 반환한 학교는 더러 있지만 재평가에서 탈락해 일반고로 전환된 자사고가 단 한 곳도 없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정권과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자사고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자사고의 위기감은 이미 지난달 표면화했다. 재지정 커트라인이 60점에서 70점으로 일제히 상향 조정됐다. 지역 내 3개의 자사고를 둔 전북 교육청은 80점으로 올렸다. 서울지역 자사고 연합회장인 김철경 대광고 교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자체 모의평가를 해보니 커트라인을 넘은 학교가 없었다”며 “퇴출을 위한 평가”라며 강력 반발했다. 교육계 안팎에서는 두자릿수 이상이 퇴출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자사고들은 이번 재평가가 대선과 교육감 공약에 꿰맞춰 폐지로 가기 위한 요식 절차라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평가지표에도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재정 기여도와 시설 개선, 교사 역량 같은 정량평가의 배점은 낮아지고 교육과정의 다양성 같은 정성평가 비중이 높아졌다. 더구나 재평가 기본계획이 지난해 말 제시되면서 사전 대비도 어려웠다고 하소연한다. 요약하면 시험 난도를 대폭 높이면서도 출제 범위조차 시험 직전에야 공개했다는 것이다. 서울지역 A자사고 교장은 국가고시의 과락이 60점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면서 “70점 커트라인은 상식을 벗어난다”고 비판했다.


지역마다 합격 기준과 평가지표가 다르다 보니 자사고의 운명이 소재지에 따라 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민족사관학교를 둔 강원도 교육청은 사회적배려대상자를 대상으로 한 사회통합전형 배점을 14점에서 4점으로 낮췄다. 전남과 경북·울산 교육청 역시 지역 내 자사고의 의견을 수렴해 평가방식을 다소 변경했다. 반면 전북 교육청은 요지부동이다. 상산고는 5년 전 평가에서 80.8점을 받았다고 한다. 간당간당한 상황인 것이다. 다음은 박삼옥 상산고 교장과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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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옥 상산고 교장은 “이번 평가는 자사고 폐지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며 “공정성과 형평성을 잃은 자사고 평가는 지방 인재의 서울 쏠림 현상을 가속화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주=권욱기자박삼옥 상산고 교장은 “이번 평가는 자사고 폐지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며 “공정성과 형평성을 잃은 자사고 평가는 지방 인재의 서울 쏠림 현상을 가속화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주=권욱기자


-유독 통과 기준이 높은데. “우리도 답답하다. 교육청이 관내 일반고를 대상으로 모의평가를 해본 결과 다들 70점을 넘었으니 자사고는 그보다 높은 80점 정도는 돼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건 재량권의 남용이다.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지역사회의 반응은 어떠한가. “전북 출신 국회의원 20명이 평가방식의 형평성과 합리성에 문제가 있다는 성명서를 교육 당국에 전달했다. 여당 의원들도 서명했다. 자사고가 없는 충북은 도지사가 나서 교육부에 자사고 지정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지방에 명문 고교가 없다면 인재들은 죄다 서울로 빠져나갈 것이다. 강남 8학군으로만 쏠림을 초래할 부작용을 왜 못 보는지 안타깝다.”

-현장에서 느끼는 교육 정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교육은 백년지계인데 정권에 따라 하루아침에 달라진다. 국민과 학생이 국가를 믿고 따르겠는가. 교육에 정치와 이념이 관여한 게 문제다. 그런 식으로 덧씌우면 교육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

자사고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는 분명 상존한다. 고교 서열화와 입시 경쟁을 부추길 우려가 있고 일반고보다 세 배나 비싼 등록금을 받는 ‘귀족학교’라는 시각도 있다. 서울과 지방 자사고 중에는 모집정원을 채우지 못하거나 법정 재단 전입금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부실학교’도 더러 있다. 서울 강남까지 자사고를 둘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자사고를 폐지한다고 해서 일반고의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거나 사교육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입제도의 근본적 변화 없이 고입제도를 손질하는 것이 본말전도라는 비판도 나온다.

오는 6월쯤 나오는 교육청의 평가 결과는 큰 파장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탈락한 자사고는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이 결여됐다며 행정 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예비 고교생과 학부모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사고 일괄 폐지보다는 일반고 자율 전환 유도와 일반고의 역량 강화가 우선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의 근원은 고입정책의 진지한 검토와 충분한 논의가 없다는 데 있다. 정작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됐다. 어른들이 교육 현장의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가.

/전주=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권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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