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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블랙홀의 시간, 도낏자루 썩는 '신선놀음'격

■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으로 본 상대적 시간

공간의 중력이 커질수록

시간의 흐름 점차 느려져

블랙홀 관찰로 이론 입증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13개 천문우주연구기관들이 공동작업으로 관측해 지난 4월 10일 공개한 블랙홀 ‘M87’의 모습. /사진제공=유럽남방천문대(ESO)한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13개 천문우주연구기관들이 공동작업으로 관측해 지난 4월 10일 공개한 블랙홀 ‘M87’의 모습. /사진제공=유럽남방천문대(ESO)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속 깊이 들어갔다가 동굴이 보이자 안으로 들어가니 길이 넓어지고 훤해지며 백발노인이 바둑을 두는 게 보였다. 대국을 구경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낏자루가 썩어 있는 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에 돌아가는데 마을의 모습이 영 딴판이었다. 한 노인을 붙잡고 얘기를 나눠보니 바로 자신의 증손이었다.”

여기서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나왔다. ‘재미있는 일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른다’거나 ‘부질없는 일에 탐닉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설화에서 동굴 안을 블랙홀의 세계라고 가정하면 과학적으로 들어맞는 시나리오가 된다.


지난 2017년 노벨물리학상 공동수상자인 킵 S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명예교수가 자문한 공상과학(SF)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나온다. 주인공인 쿠퍼가 빛도 빨아들일 정도로 중력이 어마어마한 블랙홀을 거쳐 딸(머피)을 만나니 이미 딸이 임종을 앞둔 할머니가 돼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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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남방천문대(ESO)는 지난달 세계 13개 기관이 협력한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EHT) 프로젝트’에 따른 블랙홀의 모습을 공개했다. 세계 6개 대륙 8곳에 지구 크기의 가상 전파망원경 체계를 구축해 2017년 4월에 9일간 지구에서 빛이 5,500만년 가야 닿을 수 있는 거대은하 M87(블랙홀)의 그림자를 관찰하고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원본 데이터를 최종 영상으로 변환했다. 그 결과 이 블랙홀은 질량이 태양의 65억배, 지름은 160억㎞에 달해 빛조차 탈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중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심은 검지만 경계 밖 주변의 밝은 천체나 블랙홀에서 내뿜는 빛은 강력한 중력에 의해 왜곡현상을 보여 블랙홀의 윤곽은 도넛처럼 보였다. 1915년 발표된 큰 질량 주변의 시공간은 왜곡된다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실제로 입증된 것이다.

20세기초에 이미 블랙홀 존재 가능성을 예견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모습.20세기초에 이미 블랙홀 존재 가능성을 예견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모습.


앞서 100년 전인 1919년 5월29일에도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영국 천문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이 서아프리카 기니만의 프린시페섬에서 낮에 달이 태양을 전부 가리는 개기일식이 일어났을 때 태양 주변의 별을 찍어 전날 밤 위치와 비교한 결과 별의 위치가 달라진 것을 확인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처럼 빛이 직진만 하는 게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처럼 빛이 중력의 영향으로 휜다는 것을 검증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1905년)에서는 어떤 물체가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면 시간은 느려지고 길이는 수축되며 질량은 늘어나고,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이 강한 곳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

이처럼 시간은 시간과 공간이 상호작용하는 ‘시공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지난 15일 ‘서울포럼 2019’ 개막식에서 카를로 로벨리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 이론물리학센터 교수는 “시간의 흐름은 지구라는 제한적인 조건에서 가능할 뿐 공간의 중력이 커질수록 점차 느려져 블랙홀 근처에서의 몇 분은 지구의 수백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시간이 때에 따라 느리게 가거나 빠르게 가는 게 몹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다시 말해 빛의 속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지런히 활동하거나 강한 중력처럼 무엇인가를 끌어당기는 열정을 발휘한다면 체감시간이 길어진다고 볼 수 있다. 고(故) 폴 자네 프랑스 소르본대 철학과 교수가 “1년을 10세는 10분의1, 40세는 40분의1, 70세는 70분의1로 느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자각한다”며 시간수축 효과(time-compression effect)를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갈수록 호흡·맥박·세포분열·신진대사가 느려지고 행복할 때 분비되는 도파민도 감소하는 상황에서 의미 있고 재미있는 ‘신선놀음’을 많이 하면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하는 셈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고광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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