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면서도 2017년 대선 직후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면서 떠난 양정철 원장입니다. 그랬던 그가 민주연구원장으로 여의도에 다시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정가의 ‘핵인싸’( 아주 커다랗다는 ‘핵’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는 ‘인사이더(insider)’의 합성어)를 입증했습니다. 양 원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밥만 먹었다는데 야당은 ‘관권선거’를 모의했을 거라며 쌍심지를 켜고 있고 언론들은 하나같이 부적절한 회동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관권선거 가능성이 있을지 과거 정부에서 청와대에 근무한 다선의원을 만나 물어봤습니다. 해당 의원은 관권선거를 하려는데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는 곳에서 버젓이 만나겠냐며 불필요한 빌미만 제공한 ‘아마추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과거 국정원장이 비밀회동을 하겠다 결심하면 모임 장소인 호텔의 출구조차 회동참석자들이 다르게 이용했다 합니다. 더구나 각기 다른 출구로 들어온 참석자들의 움직임에 맞춰 엘리베이터, 복도 등의 CCTV조차 꺼버리고 비밀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해당 의원은 오히려 비밀회동이 아닌 게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국정원장이 언론 카메라에 노출됐기에 망정이지, 테러집단의 총기에 노출됐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지 않겠냐는 논리였습니다. 그럼에도 기자를 동석시켰다는 점은 높게 평가했습니다. 일종의 사관을 동행시킨 효과를 노린 것으로 나름의 경계심이 작동했다는 겁니다.
양정철·서훈 이들 ‘양대원장’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밥만 먹었다는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이처럼 집중적으로 받으며 야당의 반발을 사는 인물 ‘양정철’그가 여의도에 복귀신고는 제대로 한 셈입니다.
◇밥만 먹어도 스포트라이트..원외대표라서
그간 ‘문(文)의 남자’ 또는 ‘강성 친노(親盧)’로 불렸던 양 원장은 이번 ‘회동’으로 ‘원외대표’라는 별명을 하나 더 추가했습니다. 이인영 원내대표와 함께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을 이끄는 양대 축이라는 점을 드러낸 겁니다. 올해 초 그가 민주연구원장에 내정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연구원의 역할과 위상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내년 총선을 친문(親文)으로 치르겠다는 의지가 담긴 인사라는 당내 평가가 이때 이미 나왔습니다.
실제 지난달 13일 민주연구원에 첫 출근했던 양 원장은 ‘총선 병참기지’를 언급했습니다. 민주연구원 부원장에는 재선 출신의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함께 김영진·이철희 의원과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인 이근형 윈지코리아컨설팅 대표가 맡아 전·현직 전략기획위원장이 포진했습니다. 당 대변인을 맡고 있는 이재정 의원까지 포함해 부원장을 현역 의원이 맡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입니다. 그만큼 현역 의원을 총괄하는 위치에서 양 원장은 총선 전 인재영입 역시 속도감 있게 진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서는 이처럼 민주연구원의 위상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 경계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당 대표를 중심으로 내년 총선을 대비한다기 보다 민주연구원이라는 원외 조직을 중심으로 당이 쪼개지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양 원장이 인재 영입 작업을 주도하면서 다선 의원을 젊은 정치 신인으로 대거 물갈이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와 내년 총선까지 양 원장을 둘러싼 당내 갈등이 더욱 첨예해질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원외대표 별명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 ‘싸움꾼’ ‘충신’..결국 ‘어항속 금붕어’
복귀순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양 원장을 보는 당 안팎의 시각은 복잡합니다. ‘잊혀질 권리까지 선언’했던 그를 왜 불러들였냐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그 배경은 그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내면서 언론·야당과 지나친 전선을 형성해 정권 자체에 부담을 줬다는 겁니다.
“조선·동아는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2004년 7월9일) “톱거리가 없으면 차라리 백지를 내라”(2006년 5월18일) “효자동 강아지가 청와대를 보고 짖기만 해도 정권 흔들기에 악용하는 심보가 작용한 것”(2006년 8월17일) “솔직히 어이가 없다. 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대단원의 ‘욕 사전’처럼 보인다”(2007년 2월21일) “나는 (언론말살의) 간신이 아니라 (언론개혁의) 사육신”(2007년 5월31일) 홍보기획비서관 시절 발언들은 지금 들어봐도 상당히 ‘센’게 사실입니다. 이번 회동을 첫 보도한 언론을 향해서도 양 원장은 “기자정신과 파파라치 황색 저널리즘은 다르다. 적당히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양 원장은 국회 기자들의 질문에도 “원래 약속이 있었던 것이고 일과 이후의 삶까지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반박하면서 억울한 심정을 드러냈습니다. 언론이 양 원장을 자극하는 면도 있지만 자극에 반응하는 그의 발언 수위가 높을수록 언론은 다시 그를 자극할 겁니다. 대통령 최측근의 센 발언은 분명 기사 가치가 있습니다. 고위공직자도 아닌 그가 ‘어항속 금붕어’처럼 관찰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그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노무현·문재인 대통령 두 분 대통령의 최 측근으로서 ‘충신’이기도 했지만 그 만큼 ‘싸움꾼’ 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언론은 그를 계속 자극할 겁니다. 정권에 부담을 주는 싸움꾼의 ‘센말’보다 충신의 ‘옳은 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가 지난해 내놓은 《세상을 바꾸는 언어-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디테일에 있다. 우리 생활 속 작은 일, 작은 생각, 작은 언어부터 바꿔야 한다. 배려·존중·공존·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는 배려의 언어, 존중의 언어, 공존의 언어, 평등의 언어를 쓰는 일에서 시작한다. 배려·존중·공존·평등의 언어로 생활 속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민주주의 완성 단계일 것이다” 양 원장이 이제 그의 글을 실천할 때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