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빛나는 오만과 슬픈 사랑

중세 최대의 로맨스...아벨라르와 엘로이즈




1140년 6월 3일, 프랑스 북동부 도시 상스. 성직자와 고위관리들이 약식 종교재판을 열었다. 피고는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 살아서는 ‘논리학의 전사’, 죽어서는 ‘프랑스의 소크라테스’로 불렸던 철학자이자 신학자·수도원장이던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최종 판결은 이단. 아벨라르는 1221년에도 비슷한 혐의로 이단 판결을 받았으나 이번에는 좀 더 가혹한 조치가 떨어졌다. 제자들까지 파문당하고 저서는 광장에서 불탔다. 아벨라르에게는 영원히 침묵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종교적 공민권을 두 번이나 박탈당할 만큼 그는 큰 죄를 지었을까. ‘보지 않고 믿는 은혜’나 맹신을 배격하고 ‘의심을 통해 탐구하고 진리에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 아래 신의 존재와 삼위일체론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려고 애쓴 게 죄로 엮였다. 아벨라르의 죄는 따로 있다. 스스로 자신을 묶었다. 공들여 갈고닦은 정교한 논리를 그는 칼날처럼 휘둘렀다. 스승들도 논리 싸움에서는 무자비하게 짓밟았으니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숱한 압박과 견제 속에서도 그는 아이돌급 스타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땅을 밟지 말고 강의하라’는 강의금지 판결을 받은 그가 나무에 올랐을 때는 명쾌한 논리와 열강을 들으려는 학생 수백 명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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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22개월 뒤 숨을 거둔 그의 시신은 수녀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아내 엘로이즈가 챙겼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죽도록 사랑했으나 운명과 오해로 갈라진 연인. 언어와 철학에 조예가 깊고 미모까지 갖춘 17세 소녀와 스타 교수 출신인 39세 개인교사였던 둘은 사랑에 빠졌다. 비밀결혼으로 아들까지 낳았으나 불행이 닥쳤다. 아벨라르는 거세당하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둘은 편지를 나누며 영적인 사랑을 이어갔다. 엘로이즈는 죽어서야 남편의 품에 안겼다. 아벨라르의 팔이 벌려져 엘로이즈의 시신을 안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알렉산더 포프는 시를 지었고 평생 궁핍했던 장 자크 루소는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로 돈을 벌었다. 현대에 이르러 둘은 파리의 관광자원이다. 1804년 세계 최초의 정원식 공원묘지로 조성한 페르라셰즈가 주민들의 반대로 묘지 조성이 어렵게 되자 파리시는 묘안을 짜냈다. 중세 최대 연애 사건의 주인공인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시신을 안치한 1817년 이래 페르라셰즈는 명소로 떠올랐다. 무수히 많은 예술가와 명망가들이 묻힌 이곳에서 관광객들의 발길은 두 사람의 묘소에 가장 많이 머문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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