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해 시중은행 수준의 자금세탁방지의무를 부과할 것을 권고하면서 200여개에 달하는 국내 거래소들에 비상이 걸렸다. 고객의 실명확인이 가능한 실명계좌를 은행으로부터 발급받고 있는 곳은 빗썸·업비트·코인원·코빗 등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머지 수백개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퇴출당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FATF는 조만간 거래소를 비롯한 암호화폐 취급업체에도 기존 금융권 수준의 자금세탁방지의무를 부과하는 권고안을 확정하고 FATF 표준으로 채택할 예정이다. 1,000달러 이상 거래를 하는 송금인과 수취인 정보를 암호화폐 거래소가 금융당국에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권고안의 핵심이다. 또한 거래소가 관할당국으로부터 면허나 등록을 받도록 했다. 주요20개국(G20) 중앙은행 총재 및 재무장관 회의에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FATF의 최종 권고안에 따른 거래소 관리·감독방안을 적극 이행하기로 합의해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도 FATF 권고 영향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당국도 이에 발맞춰 올 하반기 내 암호화폐 거래소의 자금세탁방지의무를 강화하는 내용의 특정 금융정보법 개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국회에는 암호화폐 거래소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상호와 대표 성명 등을 신고하도록 하는 내용의 특금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특금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실명계좌를 이용하지 않는 암호화폐 거래소는 정부가 등록 신고 수리를 거부할 사실상의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어서 빗썸·업비트·코인원·코빗 등 4곳을 제외한 나머지 거래소는 ‘미신고’ 거래소로 규정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특히 금융당국은 특금법 개정안에 FATF 권고안을 추가로 반영할 방침이어서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이 허술한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존폐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대형 거래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중소 암호화폐 거래소는 시중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를 발급받을 수 없어 자금 투명성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며 “이들 거래소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FATF 규제에 맞게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갖출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FATF발 자금세탁방지 규제 강화가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암호화폐 거래소들의 구조조정을 앞당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날 한국블록체인협회 주최로 열린 한 간담회에서 김진희 미쓰비시도쿄UFJ은행 아태지역 준법감시인은 “블록체인 기술로는 암호화폐를 받는 수신자 정보를 파악할 수 없어 FATF의 권고안을 따르기 어렵다는 우려가 강하다”며 “결국에는 암호화폐 거래소들도 국제송금에 이용되는 은행 스위프트망처럼 국제 결제망을 구축해야 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보통 암호화폐 지갑 주소는 익명으로 돼 있어 거래소에서 수령자 확인이 불가능한데 자금세탁방지 규제에 대비하려면 새로운 결제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 시중은행의 송금과 같은 절차를 거치게 되기 때문에 암호화폐 시장에도 메가톤급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기감을 느낀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집단행동에 나설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암호화폐 거래소들로 구성된 한국블록체인협회는 이달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FATF의 권고안이 과도하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FATF 측에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서경 펠로를 맡고 있는 전하진 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장은 “G20 정상회의에서 (암호화폐와 관련해) 메시지를 준다면 그에 맞게 전 세계 정부가 암호화폐 규제를 만드는 작업을 할 것”이라며 “한국이 암호화폐 시장의 중심에 서 있었는데 정부가 시장을 방치하다 보니 훅 주저앉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날 비트코인은 오후2시 기준 1비트코인 가격이 1,155만원으로 전날 대비 약 1.8% 소폭 상승에 그치는 등 ‘눈치 장세’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