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0년 6월24일, 베네치아의 남단 항구 키오자(Chioggia). 제노바 침공군이 손을 들었다. 키오자 점령 10개월 만이다. 이탈리아 연안의 패권과 지중해 상권을 두고 1258년부터 122년 동안 네 차례나 격돌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싸움도 마침내 끝났다. 제노바는 몰락하고 베네치아는 다시금 전성기를 맞으며 나폴레옹에게 점령(1797)당하기까지 상인 공화국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키오자 전투는 과학사에서도 중요하다. 서양에서 함포가 처음으로 본격 사용됐기 때문이다.
애초의 전황은 베네치아가 불리했다. 이전의 세 차례 전쟁과 달리 제노바는 파도바와 헝가리왕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가뜩이나 부족한 인구가 흑사병으로 크게 줄어든 상황. 아니나 다를까. 1378년 서전에서 해군 사령관 베토레 피사니가 크게 졌다. 1379년 8월 제노바 군은 베네치아의 얼마 안 되는 육지 땅의 관문 격인 키오자를 점령했다. 해상은 물론 육지까지 완전 포위된 베네치아인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뭉쳤다. 반목하던 귀족과 신흥상인·평민들이 앞다퉈 군대에 들어갔다. 부자들은 금고를 털어 나라에 바쳤다.
포위당한 4개월 동안 배를 곯으며 역전을 노리던 베네치아는 1380년 초 역공에 나서 키오자의 제노바 군을 포위해버렸다. 마침 대양에서 통상파괴전에 나섰던 병력까지 돌아와 전력도 높아졌다. 베네치아는 6개월 동안 역포위전을 벌인 끝에 제노바의 무조건 항복을 받았다. 포위전에서 베네치아는 화약의 힘을 이용해 무거운 돌을 날리는 대포를 함선에 달았다. 명중률이 좋지 않았지만 지름이 20~30㎝인 돌 포탄은 제노바 군의 진지를 허물었다. 제노바 군사령관도 포격으로 무너지는 탑에 깔려 죽었다. 키오자에서 선보인 함포는 서구 함선의 표준 무장으로 자리 잡고 탐험과 정복의 시대를 열었다.
제노바는 패전 이후 5년 동안 국가 원수를 열 번이나 바꾸는 정정불안을 겪은 끝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으로 전락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두각을 보인 개인도 있었으나 도시국가로서 제노바는 이 전투 때 생명을 잃었다. 망할 것 같았던 베네치아의 승인은 귀족들의 솔선수범에 있다. 방어전을 펼 때 전선을 시찰하던 국가 원수 안드레아 콘타리니는 배고픔을 호소하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족의 집으로 가시오. 그들은 빵이 하나밖에 없어도 둘로 쪼개 나눠 줄 것이요.” 전쟁을 치르며 베네치아의 함선은 두 배로 늘어났다. 부자들이 돈을 낸 덕분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