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일본 배워서 일본을 이기자] 日 '모노즈쿠리'로 세계 제패...韓 '부품소재 징비록' 다시 써야

多能보다 한 분야서 1등 기술 확보

‘ESI 전략’으로 공동목표 위해 협업

R&D투자 500대 기업 중 85곳이 일본

7일 서울의 한 일본 자동차 대리점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국내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권욱기자7일 서울의 한 일본 자동차 대리점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국내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권욱기자



‘다능은 군자의 수치다.’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일본 ‘화낙’의 회의실에는 이 같은 문구가 걸려 있다. 회사가 성장하면 사업 다각화를 꾀하는 다른 기업과는 달리 로봇에만 집중한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 때문에 화낙은 작은 연못에서 큰 잉어를 낚는다는 ‘니치톱’ 전략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사내벤처로 출발해 지난 1972년 후지쓰로부터 분사한 화낙은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계에 천착했고 현재는 스마트폰 가공 기계 산업의 80%를 점유한 기업으로 올라섰다. 이렇다 보니 주요 고객은 애플과 삼성전자다. 애플과 폭스콘은 한 대당 1억원에 달하는 화낙의 절삭로봇을 10만대, 삼성전자는 2만대가량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대지진으로 무너질 뻔한 일본 경제를 뒷받침한 것 역시 니치톱 전략을 구사하는 일본의 강소기업이었다. 물론 대지진 이후 각국이 일본으로부터의 기계와 부품·소재 수입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을 펼쳤지만 압도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 제품의 대체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틈새시장 공략에 나서는 일본 기업들의 지원은 정부가 맡았다. 일본 정부는 2014년 ‘글로벌 니치톱 100(GNT 100)’ 정책을 발표하고 기업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일경상학회는 “한국의 중소기업 육성정책과 달리 일본의 글로벌 니치톱 100은 특정 분야를 선택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전략이 담긴 것이 특징”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강소기업 전략인 ‘월드클래스 300’ 정책은 선정기업의 분야가 제각각이고, 한번에 100개 기업을 선정한 일본과 달리 8년여에 걸쳐 300개 기업을 선정하고 지원하다 보니 정책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일본만큼 지역 생산기반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무리하게 일본을 따라 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며 “시장이 크지 않더라도 필수적이며 자신의 장점이 발휘되고 유지될 수 있는 분야를 발굴하고 개척해나가는 것은 기술력이 어느 정도 있는 중소기업들에는 상당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뼛속까지 ‘모노즈쿠리’=일본이 소재부품 강국으로 발돋움한 데는 장인정신(모노즈쿠리)이라는 일본 특유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모노즈쿠리는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를 뜻하는 ‘즈쿠리’가 합성된 용어로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든다’는 뜻이다. 특히 소재 산업은 연구개발과 고객 인증 등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인내의 사업이다. 일률적인 제조 공식에 바탕을 둔 단순노동이 아닌 숙련도가 제품의 품질을 좌우하는 아날로그식 기술인 만큼 한 분야에 오랜 기간 종사한 숙련공이 필수적이다.

소재 산업의 이런 특성은 치밀한 현장 품질관리와 종신고용에 바탕을 둔 현장기술 계승이라는 일본 특유의 기업문화와 잘 들어맞는다. 예컨대 수백도의 화로에 아크릴섬유를 통과시켜 만드는 탄소섬유의 경우 화로의 배치, 투입연료의 양, 온도조절 타이밍 등 하나하나의 공정에 따라 제품의 질이 달라져 숙련공의 노하우와 경험이 필수적이다.

일본 기업은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이익 극대화의 지름길이라는 판단하에 모노즈쿠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른바 ‘작은 연못에서 큰 잉어를 잡는다’는 정신이다. 실제 도레이의 탄소섬유는 지난 1970년대 처음 등장한 후 낚싯대·골프채 등을 만들며 개량을 거듭한 끝에 1989년 보잉 777기의 구조재로 채택되는 성과를 거뒀으며, 신일철주금화학의 휴대폰용 기판 ‘에스파넥스’는 파일럿 플랜트(1986년)에서 흑자전환(1999년)까지 13년이 소요됐다.

모노즈쿠리는 일본이 시장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세계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는 제품을 다수 보유하게 된 비결인 셈이다.


액정표시장치(LCD) 소재인 TAC 필름의 경우 일본이 100%에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으며 리튬이온전지용 양극재 및 음극재, 2차 전지용 커패시터, 화합물반도체, 반도체 봉지재 등에서도 일본은 80%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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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경제연구원은 “일본 산업의 경우 시장 규모는 한정되지만 오랜 기술 축적이 필요하고 설비투자 부담도 큰 소재 및 부품 등의 틈새 사업에서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후발기업의 진출을 억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중기, 한솥밥 의식=이름도 생소한 일본 중소기업들이 전 세계 소재·부품 시장을 주름잡는 배경에는 고객사인 대기업과의 ‘밀착협업’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시혜를 베푸는 식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목표를 위해 아예 제품 초기 단계부터 협업하는 시스템이 퍼져 있다. 협력업체와 동업자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ESI(Early Supplier Involvement) 전략’이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업무협력이 단순히 하청거래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협업에 따른 성과 배분 원칙도 엄격하게 준수하는 등 대·중소기업 간 기술개발 협업 관행이 뿌리를 내렸다. 규모가 영세하고 자본력이 약한 부품소재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특정 분야 연구개발(R&D)에 몰입할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 내에서는 소재부품 기업들이 단순히 대기업의 하청 역할을 하던 데서 나아가 오히려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대기업에 제품을 역제안하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세계적인 화학소재 기업인 도레이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내세워 차체 경량화를 주도하고 있다. 탄소섬유로 만든 차량에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자동차 업체가 어떻게 부품 및 내부설계를 해야 하는지 검토하는 식이다.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파나소닉도 배터리 개발 단계부터 자국 내 관련 특수화학품 제조 중소기업과 긴밀하게 협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협업 시스템은 위기에도 강한 면모를 보였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일본 반도체 제조장치 산업의 경우 협업체계에 따른 개발 성과가 높은 제품군은 위기상황이 와도 최대 90%에 이르는 압도적인 점유율이 유지됐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기업이 개발해낸 핵심소재 기술을 대기업이 ‘내 것’인 양 탈취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는 협력업체로부터 납품받는 제품의 설계도면을 다른 업체에 제공해 납품단가를 낮춘 사례들이 경쟁 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과감한 R&D·규제 완화=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황에도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에 나서 미래를 도모하는 기업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소재·부품 분야에서는 파나소닉이 성공 사례로 꼽힌다. 기존의 소형전지를 수천개 연결해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파나소닉은 10억달러를 재투자해 세계 최대의 생산시설을 설립했고 글로벌 리튬이온전지 시장의 리더로 부상했다. 파나소닉은 현재 테슬라·포드·도요타 등에 전기자동차용 리튬이온전지를 공급하며 한 해 매출액만 8조엔(약 86조7,300억원·2018년 3월 기준)에 달한다.

일본은 자국 내 소재·부품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 산학연 공동연구개발의 전통도 확립돼 있다. 지난 1980년대부터 일본 정부는 경제산업성을 중심으로 민간이 담당하기에는 위험도가 높은 차세대 산업 기반기술, 신에너지기술, 창조과학기술, 신세기 구조재료 등 첨단 소재 분야에 대한 R&D를 중점적으로 지원해왔다. 여기에는 산업계와 학계·연구기관들의 협업이 활발하다.

반면 한국의 사정은 정반대다. 경기침체가 이어지자 기업들은 곧바로 R&D 투자를 줄였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R&D 투자가 많았던 세계 500대 기업 중 한국 기업은 13곳에 불과했다. 미국(196곳)과 일본(85곳) 등은 물론 후발주자인 중국(33곳)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 기업의 매출 대비 R&D 투자 비중도 평균 3.7%로 세계 500대 기업 평균인 5.5%보다 낮았다. 당장 설비투자도 줄여 올 1·4분기 증가율은 -17.4%로 2015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번에 일본 수출규제로 문제가 된 소재 분야의 경우 한국이 일본에 한참 뒤처지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 지원 규모를 10배로 늘려 민간이 담당하기 위험한 곳에 중점적으로 지원하고 기업에도 국산 핵심소재 의무사용을 할당해야 한다”며 “특히 소재 부문은 공장을 세우려면 환경문제로 지역민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에 규제도 확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능현·한재영·강광우·박형윤기자 nhkimchn@sedaily.com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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